가문을 빛낸 선조-Ⅲ
통정대부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위주군
通政大夫 右副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威州君
위주군(1494∼1548)께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순지(醇之) 호는 전해오지 않으며 휘(諱)는 백순(伯醇)이시다.
1494년(성종25, 甲寅) 중조 양정공 휘 우(宇)의 현손(玄孫:5세손)으로 태어나셨으며 할아버지는 신창현감(新昌縣監) 휘 인문(仁門)이시고 아버지는 결성현감(結城縣監) 휘 총(聰)이시며 어머니는 숙부인 경주이씨(淑夫人慶州李氏)로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이회(李薈)의 따님이시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따르면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빼어나고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고 한다.
1519년(중종14, 己卯)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셨고 1528년(중종23, 戊子) 참봉(參奉)으로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시어 성균관 갈옷을 벗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ㆍ대교(待敎)가 되셨고 함경평사(咸鏡評事)ㆍ예조좌랑(禮曹佐郞)ㆍ경상도사(慶尙都事)를 거쳐 호조(戶曹)와 공조(工曹)의 정랑(正郞)ㆍ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를 지내신 뒤 수원군수(水原郡守)로 나아가셨다. 다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제수되셨다가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셨으며 사도시정(司䆃寺正)ㆍ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친 다음 대동찰방(大同察訪)ㆍ인산진첨사(麟山鎭僉使)를 지내셨다.
경학(經學)에 밝으시어 1535년(중종30, 乙未) 조정에서 사유(師儒)를 뽑을 때 정사룡(鄭士龍)ㆍ박세호(朴世豪) 등과 함께 뽑히셨다. 또한 1544년 (중종 39.甲辰)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나아가시어 변방(邊方)을 지키는 일에 힘쓰셨으며 여가(餘暇) 있으실 때에는 모든 막료(幕僚)들과 더불어 활을 쏘고 시(詩)를 읽으셨으며 주변의 자제들을 모아 경사(經史)를 가르치셨다.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오시어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뒤이어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에 오르셨다.
훗날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동지 경연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嘉善大夫禮曹參判兼弘文館提學同知經筵春 秋館成均館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셨다.
오랫동안 서북 변방에 게실 때 왼쪽 팔에 종기가 나는 통증(痛症)을 앓으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결국 1548년(명종3년, 戊申) 정월 초하루 향년 55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정배(正配)는 정부인 여흥민씨(貞夫人驪興閔氏)로 승지(承旨) 원(㥳)의 따님이시고 계배(繼配)는 원주변씨(原州邊氏)로 선전관(宣傳官) 몽정(夢程)의 따님이시다. 계실과의 슬하에 1남 2녀를 두셨고 서출(庶出)로 2남을 두셨는데, 장남 휘 규(戣)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셨고 장녀는 선전관 이의로(李義老), 차녀는 군수(郡守) 신익(申瀷)의 아내가 되셨으며 서출인 휘 감(戡)과 휘 집(戢)은 모두 후손이 없으시다.
무관(武官)보다 문관(文官)을 중시하며 우대하던 조선시대 양반사회에서 정기시(定期試)인 식년 문과에 급제하셨으며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쳐 승지까지 오르시어 가문(家門)의 위상(位相)을 높이신 분이시다.
묘(墓)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송추 가마골 선영(先塋) 고조고(高祖考)이신 양정공 곡장산소 바로 위 유좌지원(酉坐之原)에 합장(合葬), 쌍분(雙墳)으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