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諱佑景慕碑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180-2 선영입구
前面
熙川金氏始祖諱佑景慕碑
左側面
公은 신라 경순왕 제八子諱錘의 셋째 아들로서 희천 김씨 찬란한 역사의 始原이며 문중 일족의 근본이니 곧始祖이시다. 諱는 佑이며 고려 전기 토적에 공을 세워 신호위대장군에 올라 온양부원군에 봉해지고 문화시중에 이르셨다. 그러나 공의 사적이 상세하게 기록된 곳이 없고 묘소마져 실전되어 후대에와서 종인들이 합심하여 弘福山 맞은편西山 선영입구에 경모비를 세운다. 公의 아들 諱令獻이 한림학사 호부상서를 손자 諱贊은 문과급제하여 이부상서를 증손자
後面
諱邦韠이 은자광록대부겸 문하평장사 상주국에이르고 거란병을 토평 한 공으로 녹훈되었으며 시호는忠懿이다. 현손 諱世勳은 이부시랑을 내손 諱履休가 공부상서를 七세손 諱用이 광정대부 판도판서 보문관제학 문화평리 밀직부사 상호군에 이르렀고 또 다시 온양군에 봉해졌다 八세손 諱仁이 중낭장첨지정사를 九세손 諱福泰가 도령중낭장호분위 대장군을 十세손 諱振은 정순대부 방예빈시사 추밀원지사를 十一세손 諱良益이 봉익대부 판전객시사에이르렀다. 十二세손 諱英庇는 희천 토호로 강계만호 가정대부 호조전서를 지내고 대광봉익대부 문하시중 진현전대학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운이 다하자 포은 정몽주 선생 등과 함께 古石山에 들어가 벼슬을하지 않았고 두문동 七十二 학자 사건의 일원으로 문장이 일세를 진동하였으며 한시 海雁歌를 지었다. 十三세손 諱宇가 정종二년 二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때 훈신들과 함께 충의를 다하여 太宗 이방원을 도와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熙川君에 봉해졌으며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훈련관 궂자좨주에 이르셨다. 태종 十八년 二월 十九일 세상을 뜨니 上은 조회를 三일 동안 받지않고 시호를 襄靖이라 내리며 특별히 不祧典을 명 하셨다. 그 후 양정공
右側面
을 中祖로 받들고 관향을 熙川으로 바꿈으로써 두 개의 본관을 쓰니 대부분 희천이라 하고 혹은 온양이라 한다. 이제 우리들은 계파를 불문하고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시조를 받들어모셔 姓孫 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선조님들의 음덕에 감읍하며 계묘년 늦 봄에 가마골 齋舍에서 양정공 十九세손 대종회장 寅鎭이 삼가 적는다.
西紀二千二十三年 癸卯 晩春 熙川金氏大宗中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