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천김씨의 선영(先塋)이 있는 곳과 주요 세거지(世居地)인 경기도 이천과 전북 정읍 및 경북 봉화의 지명유래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 송추[松湫]
송추골(松湫谷), 송추동(松湫洞)
처음에는 한자를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많아 소나무 ‘송(松)’ 자와 가래나무 ‘추(楸)’ 자를 썼다. 그러나 사계절 내내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 못 ‘추(湫)’ 자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변에 아름다운 산(山)과 신비로운 물줄기가 조화를 이루어 예부터 신선들이 노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대표적인 산으로 오봉산(五峰山)이 있는데, 오봉산은 응달말 동쪽 도봉산(道峰山)자락에 있는 높이 675m의 산이다. 봉우리가 다섯 개라 붙여진 이름이다.
교현(橋峴) 마을과 울대(鬱垈) 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오봉산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조개바위, 치마바위, 쇠뿔바위, 미끄럼바위, 매나바위가 있다. 오봉산이라는 이름은 14세기 말엽의 사실을 반영하여《태조실록(太祖實錄)》에서 처음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총 5건의 기사가 확인되는데, 대개 강무장(講武場)즉 왕의 공식 수렵 연습장이나 도읍의 주산(主山)이 연결되는 내맥(來脈)으로서 설명되어 있다.
▣ 장흥[長興]
장흥이라는 말의 뜻은 ‘오래도록 길이 흥한다.’로 풀이된다. 장흥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는 전라남도 장흥군의 경우 고려 제17대 왕 인종(仁宗)의 비(妃)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장흥이라고 고친 예에서 볼 때, 장흥면 또한 정치적 배려에 의해 이름 지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중종(中宗)의 첫째 부인인 단경왕후(端慶王后) 신씨(愼氏)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愼守勤)을 내몰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앞장서 결국 영의정까지 오르는 성희안(成希顔)의 고향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부곡[釜谷] 마을
가마골, 가막동(加莫洞)
부곡마을, 가마골, 가막동이라는 지명은 19세기 초반의 문헌에서 처음 확인된다.「청구도(靑邱圖, 1834)」는 이곳을 가막동(加莫洞)이라 소개하였는데, 이는 가마골을 가리키는 땅이름으로 추정된다.
한편「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에서는 비로소 부곡(釜谷)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대한제국 때에는 부곡상리(釜谷上里)와 부곡하리(釜谷下里)로 보다 분화되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곡상리 일부와 부곡하리를 합쳐 부곡리로 개편하였다.
통합 당시 부곡리를 구성했던 마을은 무두리, 일짜골, 동내말, 장내말 등이 있다. 부곡이란 지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 이곳이 가마골 혹은 교동(轎洞)으로 불려왔다고 한다. 즉 이곳에 이름난 인물의 묘(墓)가 많아 성묘(省墓)하는 사람들이 가마를 타고 들어오므로 이와 같은 땅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둘째,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부곡(釜谷) 역시 가마 ‘부(釜)’ 자와 골짜기 ‘곡(谷)’ 자로 구성되어 있고 부곡리에 사기장골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한국 땅이름 큰사전(1991)」에서는 고고학자들이 이곳을 조사하였으나 가마터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나「한국지명요람(1994)」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이 마을에 도자기 가마가 있었다고 소개하였고 도봉산의 계곡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고려 말기의청자와 조선 전기‧중기에분청사기(粉靑沙器)의 파편이 산재해 있다고 하면서 이곳이 도자기 원료(도토, 陶土) 채취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현재도 부곡도방(釜谷陶房)을 비롯하여 두 개의 도자기 공장이 모여 있다고 하였다. 가마골을 교동(轎洞)으로 이해했던 것은 온릉(溫陵) 등 주요 인사의 묘소가 이곳 주변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고위 신분의 인사들을 태운 가마의 왕래가 급증하자 한글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판단된다. 요즘도 장내말이라는 마을이 있다.
▣ 이천[利川]
이섭대천(利涉大川)
문헌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出征) 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지금의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利涉大川’이라는 고사(故事)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利川(이천)」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어의적으로 ‘큰내(大川)’를 건너 이로웠다’라는 것이다.
▣ 정읍[井邑]
정읍의 지명유래는 마한(馬韓) 시대 54개국 중의 하나인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이라는 자그마한 나라로 지금에 초산성지(楚山城址)가 그 고을 터로 알려지고 있다. 백제(百濟) 시대에는 정촌현(井村縣)이라 하였는데, 그 고을 터가 지금의 상교동(上橋洞) 신정마을의 샘 바다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샘마을이라는 지명은 마한 시대부터 유래하는데, 마한 시대 토착 언어를 중국인들이한자로 번역하면서 정촌(井村)이라 했고 이 이름이 백제 시대까지 사용되다가 신라(新羅) 통일 후 경덕왕(景德王) 16년(757) 비로소 고을 이름을 정읍이라 칭하게 되었다. 내장산(內藏山) 내장사(內藏寺)는 단풍철 관광지로 유명하다.
▣ 봉화[奉化]
옛날에 내자(乃字) 모양의 성(城)이 있어서 내성(乃城)이라 칭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내성이 봉화읍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봉화읍과 춘양읍이 양대 중심이고, 남동쪽에는 아늑한 청량산(淸凉山) 도립공원(道立公園)이 있다. 봉화는 대추가 유명하지만, 한때 금광(金鑛)으로 이름이 높았고 중석(重石), 납(鉛), 아연(亞鉛) 등 광물질이 풍부했다. 이런 광산 덕에 산간 오지인데도 비교적 일찍 철길이 놓였으니, ‘억지춘양’이라는 말은 이곳의 춘양에 억지로 철길을 놓았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이 철길은 광물뿐 아니라 질 좋기로 유명한 소나무도 실어 날랐는데, 좋은 소나무의 대명사인 ‘춘양목(春陽木)’은 바로 이곳 태백산(太白山) 소나무를 이른다. 봉화는 산이 깊지만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영주, 안동과 함께 진한(辰韓) 기저국(己低國) 땅이었다.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이 지역에 여러 유적을 남겼으니, 물야면 북지리(北枝里)에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고 그 인근에서 수려한 석조반가사유상(石造半跏思惟象)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려 초에 처음 봉화현(奉化縣)으로 독립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이곳을 본관으로 한 금의(琴儀)와 정도전(鄭道傳)을 배출했다. 조선 중기 이래 안동의 사족(士族)이 이주해 와 곳곳에 동족마을을 이루었으니, 안동만큼이나 봉화에도 종택(宗宅)이 많다.
봉화읍 유곡리에‘삼남 사대 길지’의 하나로 꼽히는 권충재(權沖齋: 권벌, 權橃) 유적과 물야면 가평리(佳坪里)의 계서당(溪西堂)은 그 대표적인 곳이다. 이 종택과 마을들에서는 자연에 마음을 담고 향촌에 성리학적 질서를 세웠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을 돌이켜보게 된다. 청량산 청량사(淸凉寺)는 청정(淸淨) 관광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