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궁궐로 빛나다.
서울은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都市)이다. 짧은 기간 동안 큰 성장을 이룬 최첨단 도시이면서도 전통과 현대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궐은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전통문화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잘 보존된 문화유산(文化遺産)이다.
600여 년 전에 개국한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서울을 수도(首都)로 정했다.
서울은 수려(秀麗)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편리하며 한반도(韓半島)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宮闕)을 짓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웠으며 도성(都城)과 성문(城門)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시설(施設)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 도시가 되고 있다.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와 고층 빌딩이 가득하다. 하지만 백여 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王)과 왕실 가족(王室家族)이 거쳐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라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人才)와 물산(物産)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品格)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했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中樞)가 되는 소중한 장소이다.
서울에는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 경희궁(慶熙宮) 등 조선 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祠堂)인 종묘도 조선왕조의 정신적 근간(根幹)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登載)되어 있다.
조선왕조는 예의(禮義)와 도덕(道德)을 숭상(崇尙)하며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위엄이 있고 절제(節制)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美德)이다.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선조(先祖)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智慧)와 슬기로움이 담겨 있다.
언제 어느 때 찾아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은 역사 전통의 향기를 전해주는 서울의 궁궐. 서울의 궁궐은 우리가 살아온 또 오래도록 살아갈 터전 서울을 가장 서울답게 하는 자랑이요, 힘이다.
조선을 상징하는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제일(第一)의 궁궐이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太祖)가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다지기 위해 가장 먼저 건립한 궁궐로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규모(規模)가 크고 격식(格式)도 매우 엄중(嚴重)하다.
경복궁은 북악산(北岳山: 백악산<白岳山>), 인왕산(仁王山), 낙산(駱山), 남산(南山: 목멱산<木覓山>)에 둘러싸여 있고 그 중심에 청계천(淸溪川)이 흐르는 평지(平地)에 자리 잡았다.
입지를 고를 때에는 좋은 땅은 좋은 기운(氣運)을 불러들인다는 생각에 매우 신중(愼重)했으며 전각(殿閣)들은 최고의 권위자인 왕이 머무는 공간인 만큼 나라에서 으뜸가는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왕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돌보고 왕실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궁궐에는 필요한 전각이 많았다.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이들이 이루어내는 공간은 창건(創建) 당시부터 매우 짜임새 있게 계획되었다.
궁궐의 주요 문과 전각인 광화문(光化門, 正門), 사정전(思政殿, 편전<便殿>), 강녕전(康寧殿,침전<寢殿>)은 남북(南北)을 축으로 하는 일직선상에 놓였고 이들 주요 전각에 딸린 부속(附屬)전각들은 각 영역(營域) 안에서 좌우(左右) 대칭(對稱)을 이루도록 배치되었다.
둘레에는 네모반듯하게 궁성(宮城)을 쌓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문을 냈다.
경복궁 건축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엄중한 질서(秩序)와 절제의 위엄(威嚴)은 예의와 도덕으로써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한 조선왕조의 기본 정신에서 비롯된다.
궁궐의 전각들이 각기 서열(序列)과 쓰임새에 걸맞는 규모와 모양새로 지어졌을 뿐 호사스럽거나 위압적(威壓的)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경복궁은 ‘만년토록 빛나는 큰 복을 지닌 궁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여기에는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며 대대손손(代代孫孫) 태평함을 이어가겠다는 조선왕조의 강한 소망(所望)과 이상(理想)이 담겨 있다.
경복궁이 가장 활기찼던 시절은 세종(世宗) 때이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중심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각 분야의 학문(學文)을 연구(硏究)하여 우수(優秀)한 인재들을 길러냈고 백성의 생활에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술을 개발(開發)하고 제도(制度)를 고쳐 나갔다.
특히 세종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獨創的)이고 과학적(科學的)인 문자(文字)인 ‘한글’을 발명(發明)해 냈다.《훈민정음(訓民正音)》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壬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소(全燒)된 후 273년 동안 빈터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고종조(高宗朝)에 중건(重建)하면서 330여 동(7,700여 칸)의 전각을 지었다. 현재 궁궐 곳곳에 깔린 잔디밭은 대부분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섰던 곳들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복원(復元)하고자 하는 지속적(持續的)인 관심과 노력 속에 근래 강녕전, 교태전(交泰殿), 자선당(資善堂), 비현각(丕顯閣), 건청궁(乾淸宮), 태원전(泰元殿), 흥례문(興禮門), 영제교(永齊橋), 광화문 등 주요 전각과 문(門), 다리가 복원되었다.
▣왕에게 사랑받은 창덕궁
창덕궁(昌德宮)은 동쪽에 자리 잡은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동궐(東闕)’로도 불렸다. 경복궁을 보조하는 궁궐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보다 먼저 복구되어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조선의 법궁(法宮: 正宮)이 되었다.
경복궁이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궁궐로서 위엄과 권위(權威)가 돋보였다면 창덕궁은 궁궐의 기본 격식과 규모를 갖추면서도 자연(自然)속에 조화(調和)롭게 깃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후원(後苑)은 조선시대 궁궐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景致)가 아름답다. 자연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그대로 따르면서 최소한의 손길을 더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 솜씨가 절묘(絶妙)하다.
조선시대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정조(正祖)는 즉위(卽位)하자마자 후원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인재를 모았다.
왕과 신하들이 후원의 부용지(芙蓉池) 주변을 거닐며 시(詩)를 짓고 나랏일을 의논하는 모습은 언제 떠올려도 흐뭇한 장면이다.
자연환경(自然環境)과 탁월(卓越)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궁궐 건축과전통 정원의 원형(原形)을 잘 간직한 창덕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왕실 이야기 풍부한 창경궁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궁궐이다.
조선 초기에 경복궁을 법궁,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해 오다가 창덕궁의 생활공간이 좁아지자 성종(成宗)이 창덕궁과 이웃한 곳에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大妃)들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마련한 곳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내전(內殿) 영역이 외전(外殿) 영역보다 넓다.
왕이 정사(政事)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지은 별궁(別宮)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전인 명정전(明政殿)과 편전 등 정치 공간도 잘 갖추었기에 궁궐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東向)한 궁궐이다. 남‧서‧북쪽이 구릉(丘陵)이고 동쪽은 평지인 지세를 그대로 따라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은 남향(南向)하는 등 다른 궁궐과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전각들은 대체로 아담하다. 왕실 웃어른을 섬기는 마음으로 세운 궁궐이고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내전 위주로 발전했기에 왕들의 지극한 효심(孝心)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愛憎), 왕비(王妃)와 후궁(後宮)의 갈등(葛藤) 등 역사에 남은 왕실 가족 이야기가 풍부하게 전한다.
▣전통과 근대가 만난 덕수궁
덕수궁(德壽宮)은 임진왜란 중 선조(宣祖)가 임시(臨時) 궁궐로 사용하였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時節)에는 황궁(皇宮)으로 사용되었다.
고종(高宗)은 이곳에서 국호(國號)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圜丘壇)을 새로 지어 제사를 올린 뒤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분명히 밝혀 조선에 대한 이권(利權)을 놓고 치열(熾烈)하게 다툼을 벌이던 열강(列强) 사이에서 주도적(主導的)으로 정국(政局)을 이끌어 나가고자 했던 고종의 강력한 선택(選擇)이자 의지(意志)였다.
개화(開化) 이후 서구열강(西歐列强)의 외교관(外交官)과 선교사(宣敎師)들이 정동(貞洞) 일대에 모여들면서 덕수궁과 정동은 근대 문물(近代文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덕수궁에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선 것도 이 같은 맥락(脈絡)이다. 정관헌(靜觀軒)이 전통 방식에 서양풍(西洋風)을 섞어 지었다면 석조전(石造殿)은 서양식으로만 지은 건물이다. 고종 당시 상당한 격식을 갖추었던 전각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의 정동과 시청(市廳) 앞 광장(廣場) 일대를 아우르던 궁역(宮域)도 3분의 1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덕수궁은 험난함 속에서도 꿋꿋이 지켜온 역사와 사계절(四季節) 아름다운 자연을 이야기하는 문화 공간(文化空間)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인데, 본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던 곳을 임란(壬亂) 때 궁궐로 사용하다가 광해군(光海君)이 경운궁이라는 궁명(宮名)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태상황(太上皇)이 된 후 고종이 머무르면서 덕수궁으 바꿨다.
서쪽에 있다하여 ‘서궐’로 불리던 경희궁(慶熙宮)은 1617년(광해군 9, 丁巳)에 지었는데,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吉地)에 새 궁을 세우고자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 선조의 아들, 훗날 원종으로 추존)의 옛집에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술사(術師)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워 경덕궁(慶德宮)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亂)으로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복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卽位式)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제19대 숙종(肅宗)이 경덕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昇遐)한 곳도 역시 이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 제20대 경종(景宗) 또한 이 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英祖)는 여기서 승하하였다.
제22대 정조(正祖)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純祖)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제24대 헌종(憲宗)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760년(영조 36, 庚辰)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다.
그것은 원종의 시호(諡號)가 경덕(敬德)이므로음(音)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경희궁은 서쪽에 있다 하여 ‘서궐(西闕)’로 불린 소박(素朴)하고 아름다운 궁궐이며 ‘동궐’인 창덕궁이 법궁으로 쓰이는 동안 보조 궁궐로 사용되었다.
한창 때 이름있는 전각만 해도 120동이 넘는 어엿한 궁궐이었으나 지금은 궁역(宮域)이 크게 줄었다.
▣신성한 왕실의 사당 종묘
종묘(宗廟)는 조선시대 역대(歷代)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사당(祠堂)이다. 종묘제례(宗廟祭禮)는 나라의 가장 중요한 예(禮)로서 엄격한 절차와 격식에 따라 왕이 친히 모셨으며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어우러져 장대함을 더했다.
종묘는 야트막한 산과 숲에 둘러싸여 있으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 제례준비에 필요한 몇몇 부속 전각으로 이루어졌다. 전각은 최소한의 색만 사용하고 화려한 단청(丹靑)을 하지 않았으며 장식(裝飾) 기교(技巧)를 최대한 절제하였다.
해마다 5월 첫째 일요일이면 종묘에서 종묘제례가 거행된다. 조선 왕조는사라졌지만 왕실의 조상들을 위한 공간과 제사,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음악은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오고 있다.
선대의 왕과 왕비를 위해 제례를 올리고 그 전통을 600년 넘게 이어온 사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 목록’에 선정되었다.
종묘제향(宗廟祭享)은 조선시대에는 역대 음력으로 4맹삭(四孟朔) 즉, 1, 4, 7, 10월과 납향일(臘享日) 등 모두 5회에 걸쳐 받들어 왔으나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에 중단되었다가 1971년부터 전주이씨(全州李氏) 대동종약원에서 5월 첫째 일요일에 한 번 받들고 있다고 한다.
또 종묘제례에는 음악과 무용이 따르는데, 음악《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이 연주되고 무용은 팔일무(八佾舞: 64명이 춤추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연행(演行)된다. 음악과 무용은 현재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의 악사(樂士)와 무인들이 대행한다.
▣궁궐의 얼굴 광화문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은 문루(門樓)가 2층이며 홍예문(虹霓門)이 셋으로 조선 궁궐의 모든 문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어 그 위풍당당(威風堂堂)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선 태조 때 건립된 이후 임진왜란으로 인한 전소(全燒), 일제(日帝)의 총독부(總督府) 청사 신축에 따른 이건(移建), 6‧25전쟁 당시 문루(門樓) 소실(燒失) 등 험난한 질곡(桎梏)의 세월을 겪었으며 1968년 중심축이 틀어진 채 콘크리트로 복원되어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이러한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2010년 8월, ‘제 모습을 찾은 광화문’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고종 연간(1863∼1907)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일제에 의해 변형된 축선(軸線)이 제자리를 찾았고 금강소나무로 재건(再建)된 문루는 한국적 건축미를 뽐낸다.
높이 7.5m, 폭이 남북 11m, 동서 길이가 45m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웅대한 석조물(石造物)인 홍예문이 복원되었고 한글로 되어있던 현판 또한 당시의 글씨[漢字]를 되살려 완성되었다.
이러한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훼손(毁損)된 민족정기(民族精氣)를 바로 세우고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활짝 열어갈 문이 될 것이다.
▣서울 성곽
수도(首都) 서울을 지키기 위해 쌓은 조선시대의 성곽(城郭‧城廓)이다.
서울을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이라 할 수 있는 북쪽의 현무(玄武), 북악산 (北岳山:白岳山, 342m), 서쪽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338m), 남쪽의 주작(朱雀), 남산(南山:木覓山, 262m), 동쪽의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 125m)을 잇는 성곽의 평균 높이는 약 5~8m, 전체 길이는 18.6km에 이르며 성곽을 따라 서울 한 바퀴를 도는 탐방로(探訪路)가 있다.
숲속 흙길을 걸으며 서울 도심 안팎을 두루 눈여겨 볼 수 있다.
성곽의 사대문(四大門)으로 정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정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정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그리고 정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세웠다. 한편 사소문(四小門)으로 북동쪽에 혜화문(惠化門 : 東小門) 남동쪽에 광희문(光熙門:시구문, 屍軀門‧水口門) 남서쪽에 소의문(昭義門:西小門:소덕문, 昭德門) 그리고 북서쪽에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 紫霞門 : 北門)을 세웠다. 또한 광희문 남쪽 남산 봉수대(烽燧臺) 동쪽에 남소문(南小門)을 설치한 것은1457년(세조 3, 丁丑) 광희문을 통과하여 한강 나루터로 가려면 불편하므로 남소문을 통해 곧바로 한강 나루터로 갈 수 있는 문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설치된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원년, 己丑)에 폐쇄되었다.
한편 서울 성곽은 외사산(外四山)이라고 불리는 북쪽의 북한산(北漢山, 고도 836m), 서쪽의 덕양산(德陽山: 幸州山, 125m), 남쪽의 관악산(冠岳山, 632m), 동쪽의 용마산(龍馬山, 348m)에 둘러싸여 있다.
▣ 도성 설계[都城設計]에 동네 이름까지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奉化)이고 자는 종지(宗之)이며 호는 삼봉(三峯)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性理學的)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政敵)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왕조의 끝자락인(1865년(고종 2년, 乙丑)에 가서야 겨우 신원(伸寃)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기틀을 잡기 위한 정도전의「만기친람(萬機親覽)」은 혀를 찰만했다. 1394년《조선경국전》의 편찬은 그의 혁혁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規範體系書)서였다.
《조선경국전》은 막 개국한 조선왕조의 헌법이었으며 훗날《경국대전》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역대부병시위지제(歷代府兵侍衛之制)라는 ‘군제개혁안’을 그림을 넣어서 편찬. 임금에게 바쳤다. 얼마나 병법에 해박했으면 그림까지 그려 설명할 정도였을까?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뿐인가 정도전은 한양 신도읍지 건설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도성 건설의 청사진을 설계했다. 한양의 종묘, 사직, 궁궐, 관아, 시전, 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새 도읍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자「신도가(新都歌)」라는 노래까지 지어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 주고 흥을 돋우어 주었다. “ ~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만세 누리소서.”경복궁과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교태전(交泰殿), 강녕전(康寧殿),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등 궁궐 및 전각의 이름과 융문루(隆文樓), 영추문(迎秋門), 건춘문(建春門), 신무문(神武門) 등 궐문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이었으며 지금도 상당 부분 남아있는 한양도성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는 직접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낙타산(낙산)에 올라 거리를 실측하여 18km가 넘는 도성을 설계했다.
한양을 동‧서‧남‧북‧중(中) 5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수십 개의 방(坊)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정했다. 예컨대, 연희, 덕성, 인창, 광통, 낙선, 적선, 가회, 안국, 명통, 장통, 서린 등의 이름이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냥 지은 게 아니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덕(德), 선(善) 등 유교(儒敎)의 덕목을 담은 명칭이었다. 또한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 풍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도전과 하륜은 둘 다 개국 공신이었으나 기여도면에서 보면 하륜은 정도전에 비해 미미하였다. 그럼에도 정도전은 죽임을 당하여 무려 467년을 역적으로 지낸 셈이었으나 하륜은 태종의 묘정(廟庭) 한편에 모셔져 500년 동안 나라의 제사상을 받는다. 하륜은 어떻게 권력 중심부에 섰을까? 바로 풍수를 통해서다.
1393년(태조 2, 癸酉) 경기 관찰사 하륜은 상소 한 장을 올린다. “신이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지내면서 여러 풍수서적을 대략 깨쳤습니다. 지금 듣기로 계룡산(鷄龍山) 땅은 산은 북서쪽에서 오고 물은 남동쪽으로 빠져 나간다하는데, 이것은 송나라 풍수사 호순신(胡舜申)이 말한 ‘수파장생(水破長生: 산과 물의 흐름이 아주 나쁜 방향)’으로 곧바로 망할 땅입니다.” 이 상소 한 장으로 1년 넘게 진행돼 주춧돌까지 놓였던 계룡산 도읍지 계획은 취소된다. 더불어 하륜이 정국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어쨌든 상소와 계룡산 도읍지 취소를 계기로 이성계는 하륜더러 서운관(書雲觀: 후에 관상감<觀象監>)에 저장된 비록(秘錄)을 모두 읽게 한 뒤 천도할 땅을 다시 살피도록 한다. 천기누설(天機漏洩)이 담긴 책들을 열람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특권이었다. 이후 그가 태종(이방원)의 측근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동구릉에 있는 태조(이성계)의 무덤(건원릉)도 하륜의 작품이었다. 그는 1416년(丙申) 함경도에 있는 왕실 조상 무덤들을 살피러 갔다가 사망한다. 순직한 하륜을 태종은 ‘자신의 팔과 다리이자 나라의 기둥이었다.’고 애도했다고 한다.
우석대학 교양학부 김두규 교수는 국운풍수(國運風水)라는 제목 아래〈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하륜의 상소를 ‘풍수구테타’라고 표현하였고 한반도 풍수사(風水史)에서 “하륜의 의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하였으며 조선 500년의 풍수는 하륜의 풍수였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의 지리업(地理業: 풍수를 다루는 관직) 고시과목 9개를 모두 폐기하고 새로운 풍수서적 들로 대체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수를 십학(十學:열 가지 교육기관)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킨 당사자(當事者)였다고 기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