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ㆍ정종ㆍ태종ㆍ세종실록
(자헌대부 병조판서 희천군 휘 우, 資憲大夫 兵曹判書 熙川君 諱 宇)
1)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6월 28일 경인 1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사헌부에서 첩으로 아내를 삼은 김우와 함부로 과전을 받은 변옹을 탄핵하다
헌사에서 장군(將軍) 김우(金宇)가 아내를 버리고 첩을 대신 아내로 삼은 것과 전 예안 감무(禮安監務) 변옹(卞雍)이 함부로 과전(科田)을 받은 죄를 탄핵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우(宇)는 파직시키고, 옹(雍)은 외방으로 귀양보내었다.
2)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6번째기사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조사의‧이염 등을 옥에 가두고 정진 등을 충군하고 이조 등을 귀양보내다
전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사의(趙思義)‧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이조 의랑(吏曹議郞) 이조(李慥)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정진(鄭津)과 강택(康澤)을 전라 수군(全羅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대장군 한규(韓珪)‧손원만(孫原萬)‧송천우(宋千佑)를 경상 수군(慶尙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사복경(司僕卿) 이보검(李寶劍)과 장군 임득방(任得邦)은 강원 수군(江原水軍)에 충군(充軍)하고, 전 장군 하승해(河承海)를 풍해 수군(豊海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목인해(睦仁海)·박미(朴????)‧이천우(李千祐)는 청해 수군(靑海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이조(李慥)를 흥덕진(興德鎭)으로, 강계권(康繼權)을 각산(角山)으로, 정신의(鄭臣義)를 영해진(寧海鎭)으로, 오몽을(吳蒙乙)을 이산진(伊山鎭)으로, 장군 조홍(趙洪)과 전 장군 이등(李登)을 순성진(蓴城鎭)으로, 군자감(軍資監) 김우(金宇)와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남포진(藍浦鎭)으로 귀양보내고, 김사행(金師幸)과 조사의(趙思義) 등 21인을 사유(赦宥)하였다.
3)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을 토산(兎山)에 추방하였다. 방의(芳毅)‧이방간(李芳幹)과 정안공(靖安公)은 모두 임금의 동복 아우였다.
(생략)이숙번이 선죽(善竹) 노상(路上)에 이르니, 한규(韓珪)‧김우(金宇) 등의 탄 말이 화살에 맞아 퇴각하여 달아났다. 이숙번이 한규에게 이르기를,
“네 말이 죽게 되었으니, 곧 바꿔 타라.”
하고, 김우(金宇)에게 이르기를,
“네 말은 상하지 않았으니, 빨리 되돌아가서 싸우라.”
하고, 이숙번이 달려서 양군(兩軍) 사이로 들어가니, 서귀룡(徐貴龍)이....(중략)
[註]제4편 제3장 130쪽부터 137쪽에 전체를 수록하였음
4)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1월 15일 을해 2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이저‧이거이 등에게 좌명 공신의 훈호를 내리는 교서
좌명(佐命)한 공(功)을 기록하여 4등(等)으로 하고, 하교(下敎)하였다.
(생략)대장군(大將軍) 연사종(延嗣宗)·한규(韓珪)·김우(金宇)·문빈(文彬), 전 중군 장군(中軍將軍) 윤목(尹穆) 등 22인은 정성을 바쳐 협찬(協贊)하고, 오래 조호(調護)를 부지런히 하여 익대 좌명하였고, 군자 소감(軍資少監) 송거신(宋居信)은 위태로움을 당해 환(患)을 구제하여 익대 좌명하였으니, 4등으로 칭하하고, 부·모·처를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음직을 주고, 밭 60결, 노비 6명,...(중략)[註]제4편 제3장113쪽부터116쪽에 전체를 수록하였음.
5)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1월 25일 갑진 2번째기사 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이거이‧이숙번‧민무질 등에게 군직을 제수하다
이거이(李居易)로 좌도 도통사(左道都統使)를, 이숙번(李叔蕃)으로 도진무(都鎭撫)를, 민무질(閔無疾)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이지(李至)‧곽충보(郭忠輔)‧이행(李行)‧한규(韓珪)로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를 삼고, 김우(金宇)‧심귀령(沈貴齡)‧이순(李淳)‧최사위(崔士威)는 김계지(金繼志)와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발행(發行)하게 하였다.
6) 태종실록 10권, 태종 5년 8월 23일 병술 2번째기사 1405년 명 영락(永樂) 3년
사헌 집의 윤향이 신극례 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헌 집의(司憲執義) 윤향(尹向)이 신극례(辛克禮)와 신씨(辛氏)‧김씨(金氏) 등의 죄를 청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정희계(鄭熙啓)의 처 신씨(辛氏)와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의 처 김씨(金氏)가 밤이면 조화(趙禾)의 처 김씨(金氏)의 집에 모이는데, 신씨(辛氏)의 아우인 취산군(鷲山君) 극례(克禮)가 매양 이에 참여하여 추(醜)한 소문이 밖에까지 흘러나왔다. 향(向)이 상소하여 극례와 신씨‧김씨 등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극례는 공신이고, 화(禾)는 준(浚)의 형의 아들이라 하여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다.
7) 태종실록14권, 태종 7년 8월 24일 을사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사헌부에서 귀경길에 역참의 모든 닭‧개를 매에게 먹인 희천군 김우의 죄를 청하다
사헌부에서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의 죄를 청하였다. 김우가 강계도병마사(江界都兵馬使)를 파하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매[鷹子]를 가진 것이 많아 30여 련(連)이나 되니, 지나는 군현(郡縣)의 참(站)·역(驛)에 닭과 개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그 죄를 바루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김우는 공신이니, 비록 범한 것이 있어도 죄를 가할 수 없다. 군현(郡縣)의 수령(守令)‧참로(站路)의 찰방(察訪)‧각역(各驛)의 승(丞)에 이르러서는, 오직 김우의 말만 따르고 한 사람도 법에 의거하여 금지한 자가 없었으니 참으로 죄줄 만하다. 헌부(憲府)에서 마땅히 탄핵하여 아뢰라.”
8)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0월 3일 계미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둘째 아들 이호를 효령군으로 봉하다. 의정부 찬성사‧형조 판서‧대사헌 등의 임명
제2자(第二子) 이호(李祜)를 봉하여 효령군(孝寧君)을 삼고, 이직(李稷)으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임정(林整)으로 형조 판서를, 안원(安瑗)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연사종(延嗣宗)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겸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김우(金宇)로 희천군(熙川君) 겸 좌군 총제(左軍摠制)를, 윤향(尹向)으로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강회중(姜淮仲)·유두명(柳斗明)으로 좌·우사간 대부(左右司諫大夫)를 삼았다. 대간(臺諫)이 모두 벼슬이 파면되었으나, 윤향만이 홀로 천직(遷職)되었다.
9)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2월 2일 신사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永樂) 5년
대호군 황상을 파직하고, 총제 김우의 갑사 양춘무 등을 수군에 편입시키다
대호군(大護軍) 황상(黃象)을 파직시키고, 갑사(甲士) 양춘무(楊春茂) 등 네 사람을 수군(水軍)에 편입시켰다. 처음에 황상이 상기(上妓) 가희아(可喜兒)를 첩으로 삼았는데, 총제(摠制) 김우(金宇)도 또한 일찍이 가희아와 정을 통하였었다. 동짓날 내연(內宴)이 파하자, 가희아가 궁문(宮門)을 나와 황상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김우가 부하 갑사(甲士)와 종인(從人)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리다가 탈취(奪取)하려 하였으나 붙잡지 못하고, 뒤쫓아 황상의 집에 이르러 수색하였으나 또한 잡지 못하였다. 이튿날 황상(黃象)이 가희아(可喜兒)로 하여금 말을 타고 종을 거느리고 저자[市]를 지나가게 하였는데, 김우(金宇)가 또 갑사(甲士)와 복종(僕從)을 보내어 기다리게 하므로, 황상이 말을 달려 장(杖)을 가지고 쫓으니, 갑사(甲士)와 종인(從人)이 모두 흩어지고, 구경꾼이 담장처럼 늘어섰다. 도로(道路)에서 말이 전해져 소문이 났으나, 핵문(劾問)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임금이 듣고 사헌 지평(司憲持平) 김경(金庚)을 불려 명령하였다.
“내연(內宴)에 정재(呈才)하는 상기(上妓)를 간혹 제 집에 숨겨 두고 제 첩(妾)이라 하여, 항상 내보내지 않는 일이 있다. 내가 일찍이 얼굴을 아는 기생도 내연(內宴)에 혹 나오지 않는 자가 있어, 정재(呈才)에 궐원(闕員)이 생긴다. 그것은 족히 말하잘 것이 없지마는, 제 집에 숨겨 두고 ‘제 첩이라’고까지 하는 것은 어떻다 하겠는가! 너는 마땅히 거론하여 탄핵해 아뢰라.” 수일이 지난 뒤에 장령(掌令) 탁신(卓愼)을 불러 명령하였다.
“이제 들으니, 상기(上妓)의 연고로 말미암아 탄핵을 당한 자가 많다고 하는데, 전날 내가 말한 것은 여러 해 동안 제 집에 숨겨 두고 외출하지 못하게 하는 자를 가리킨 것이고, 조관(朝官)이 상기(上妓)를 첩으로 삼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하구(河久)·김우(金宇)는 이미 출사(出仕)하게 하였으니, 너는 그리 알라!” 탁신이 아뢰기를,
“김우의 죄는 하구와 같지 않습니다. 대저 대낮에 큰길 가운데서 금군(禁軍)을 보내어 사사 싸움을 시켰으니, 이 버릇이 자라고 그치지 않는다면, 후일에 난을 꾸미는데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김우는 공신이니 치죄(治罪)할 수 없고, 꾀어서 나쁜 짓을 하도록 이끈 자를 핵실(覈實)하여 아뢰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아뢰었다.
“지난 11월 12일 밤에 김우(金宇)가 자기 소관(所管)인 갑사(甲士) 가운데 기병(騎兵)‧보병(步兵) 30여 명을 보내어 황상(黃象)의 집을 포위하고, 갑사 나원경(羅原冏)‧고효성(高孝誠) 등이 곧장 황상의 내실(內室)에 들어가 기생첩 가희아(可喜兒)를 찾았으나 잡지 못하니, 그 의장(衣裝)을 취하여 갔습니다. 이튿날 김우가 다시 구종(丘從)과 조례(皂隷)를 보내어 가희아를 빼앗아 오게 하여, 수진방(壽進坊) 동구(洞口)에 이르니, 황상이 듣고 말을 달려 장(杖)을 가지고 추격하여 가희아를 뒤쫓았습니다. 이리하여 김우가 즉시 주번 갑사(晝番甲士) 양춘무(楊春茂)‧고효성(高孝誠)‧박동수(朴東秀) 등 10여 명과 사반(私伴) 20여 명을 발하여, 장(杖)을 가지고 황상과 더불어 서로 싸웠는데, 양춘무가 황상을 쳐서 은대(銀帶)가 깨어져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군정(軍政)은 엄한 것을 주장으로 삼아 각각 그 분수를 지킨 뒤에야, 상하(上下)가 서로 편안하고, 계급 사이에 서로 능멸하거나 범(犯)하지 아니하여, 위에서는 능히 명령을 내고 아래에서는 잘 복역(服役)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근심이 영원히 없어질 것입니다. 김우는 미천한 집안에서 출신하여 별로 재주와 덕이 없는데, 후하게 주상의 은혜를 입어서 벼슬이 총제(摠制)에 이르렀으니, 날로 더욱 근신하여 주상의 은혜를 갚기를 도모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일 터인데, 의리를 돌보지 않고 불법한 짓을 자행하여 마음대로 금군(禁軍)을 발하여 남의 첩을 빼앗았으니, 이것이 큰 난(亂)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양춘무(楊春茂) 등은 금군(禁軍)이 된 몸으로 도리어 김우(金宇)의 사분(私忿)에서 나온 명령을 따라, 밤에 황상의 집을 포위하였고, 또 길거리에서 서로 더불어 격투하여 그 은대(銀帶)를 쳐서 떨어뜨렸으니 실로 부당합니다. 황상(黃象)은 작지 않은 3품관으로서 장(杖)을 가지고 말을 달려 조정길[朝路]에서 기첩(妓妾)을 다투었으니, 빌건대, 김우(金宇)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그 죄를 밝게 바루어서 난의 근원을 막으시고, 양춘무(楊春茂)·고효성(高孝誠)·박동수(朴東秀)·나원경(羅原冏)은 직첩을 회수하고 율에 의하여 논죄하고, 황상(黃象)도 또한 정직(停職)시켜서 선비의 풍습을 고치게 하소서.” 임금이 명하기를,
“황상은 파직시키고, 양춘무 등 네 사람은 각각 본향(本鄕)의 수군(水軍)에 편입하고, 가희아는 장(杖) 80대를 수속(收贖)하게 하고, 김우는 공신이니 거론하지 말라.” 하니, 사헌부에서 또 아뢰었다.
“김우(金宇)는 작년에 강계 병마사(江界兵馬使)로 있을 때에 탐욕(貪慾)을 자행하였고, 체대(遞代)를 당하여 서울로 올라올 때에 반인(伴人)을 많이 거느리고 역참(驛站)마다 유숙하면서 개와 닭을 도살하여, 폐해가 백성에게 미쳤으므로, 본부(本府)에서 그 죄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그 작은 공로를 생각하시어 내버려두고 논하지 말게 하셨으니, 진실로 마땅히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주상의 은혜를 갚기를 도모해야 할 터인데, 전의 마음을 고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죄를 짓더라도 반드시 은유(恩宥)를 입으리라.’ 여기고, 강포(强暴)한 짓을 방자히 하여 임의로 금병(禁兵)을 발하여 밤중에 남의 집을 포위하고, 그 기생첩을 강탈하여, 대낮에 조로(朝路)에서 떼를 지어 난동을 부리기에 이르렀으니, 정상과 범죄가 심중(深重)합니다. 만일 또 죄책을 가하지 않으면, 지난 일을 징계하는 바가 없어 뒷날에는 장차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빌건대, 김우(金宇)를 한결같이 전일의 장신(狀申)한 바와 같이 시행하소서.”
소(疏)가 올라가니, 대내(大內)에 머물러 두었다.
10)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5월 18일 병인 1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희천군 김우 등을 경기좌·우도에 나누어 보내 왜적을 방비하게 하다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 등을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에 나누어 보냈으니, 왜적(倭賊)을 막기 위함이었다. 김우(金宇)로 경기우도(京畿右道) 교동(喬桐) 등처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김귀보(金貴寶)로 조전 첨절제사(助戰僉節制使)를, 김만수(金萬壽)로 좌도(左道) 연흥(延興)·자월(紫月) 등처 수군 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최용화(崔龍和)로 조전 첨절제사를, 조비형(曹備衡)으로 경기좌도(京畿左道) 대진(大津) 등처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삼고, 호군(護軍) 이도(李韜)로 경기좌도 병선 군기 점고 별감(京畿左道兵船軍器點考別監)을, 군기 주부(軍器注簿) 최해산(崔海山)으로 경기우도 병선 군기 점고 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을 삼아 즉일(卽日)로 길을 떠나게 하고, 이관(李灌)으로 사헌 집의(司憲執義)를, 권헌(權軒)·신간(申簡)으로 장령(掌令)을 삼고, 권우(權遇) 등은 모두 면관(免官)시켰다.
11)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7월 8일 갑인 2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김우·권충·박영 등을 각 지방 도병마사 등의 관직에 임명하다
김우(金宇)로 강계(江界) 등처 도병마사(都兵馬使)·판강계부사(判江界府事)를, 권충(權衷)으로 이성(泥城) 등처 도병마사(都兵馬使)·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事)를, 박영(朴齡)으로 길주도 찰리사(吉州道察理使) 겸 판길주목사(判吉州牧事)를, 한흥보(韓興寶)로 경원(慶源) 등처 병마사(兵馬使) 겸 경원 부사(慶源府使)를, 윤사수(尹思修)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를, 이간(李衎)으로 강원도 병마 도절제사(江原道兵馬都節制使)·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를, 함부림(咸傅霖)으로 풍해도 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판황주목사(判黃州牧事)를, 김계지(金繼志)로 풍해도 병마 도절제사(豐海道兵馬都節制使)·판해주목사(判海州牧事)를 삼았으니, 모두 의정부(議政府)에서 입초(入抄)한 것을 가지고 낙점(落點)하여 차견(差遣)한 것이었다. 가족(家族)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12)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2월 22일 을미 2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강계에 있을 때 요동에 밀무역한 희천군 김우의를 탄핵
사헌부(司憲府)에서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의 죄를 청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김우가 일찍이 강계(江界)에 부임하여 초피(貂皮) 50장과 황랍(黃蠟) 16근을 가지고 비밀히 통사(通事) 박지성(朴之成)에세 부탁하여, 요동(遼東)에 가서 초피 10장으로는 능(綾) 2필을 사고, 20장으로는 중견(中絹) 10필을 샀습니다. 박지성이 돌아오니, 김우가 이미 벼슬이 갈렸으므로, 길에서 만나 능(綾)·견(絹)과 남은 초피 20장을 김우에게 되돌려 주고, 다만 황랍만 강계부(江界府)에 도로 바쳤습니다. 본부(本府)에서 그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이문(移文)하여 이 사실을 갖추 알아냈습니다. 김우가 금하는 물건을 함부로 거두어 국경을 넘어 매매한 죄는, 이를 엄하게 징계하여 후인을 징계함이 마땅합니다.”
임금이 소장을 대내(大內)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아니하였다.
13)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0월 27일 을축 5번째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11도에 도절제사 각 1인과 그 밑에 절제사 또는 첨절제사를 임명하다
11도(道)에 도절제사(都節制使) 각 한 사람을 두고, 그를 보좌하는 자는, 가선(嘉善) 이상은 절제사(節制使)를 삼고, 통정(通政) 이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삼았다. 상주·진주도(尙州晉州道)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과 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이고, 계림(雞林)‧안동도(安東道)는 여산군(麗山君) 김승주(金承霔)와 전 절제사(節制使) 조완(曹緩)이고, 전라도(全羅道)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과 회령군(會寧君) 마천목(馬天牧)·총제(摠制) 조흡(曹洽)이고, 충청도(忠淸道)는 도총제(都摠制) 김남수(金南秀)와 총제(摠制) 조질(趙秩)‧성발도(成發道)이고, 경기좌도(京畿左道)는 안원군(安原君) 한장수(韓長壽)와 전 절제사(節制使) 유습(柳濕)‧전 첨총제(僉摠制) 박지(朴芷)이고, 경기우도(京畿右道)는 도총제(都摠制) 정진(鄭鎭)과 첨절제사(僉節制使) 강유신(康有信)‧홍부(洪敷)이고, 풍해도(豐海道)는 전 절제사(節制使) 김계지(金繼志)와 김중보(金重寶)‧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이고, 강원도(江原道)는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심인봉(沈仁鳳)과 전 총제(摠制) 이승간(李承幹)‧전 첨총제(僉摠制) 문효종(文孝宗)이고, 동북면(東北面)은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과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화영(李和英)이고, 평양도(平壤道)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과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총제(摠制) 이지실(李之實)이고, 안주도(安州道)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와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동지총제(同知摠制) 김만수(金萬壽)이다. 또 첨총제(僉摠制) 문천봉(文天奉)과 상호군(上護軍) 김옥(金玉)으로 동북면(東北面) 별패(別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14)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2월 12일 무술 2번째 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사헌부에서 취각할 때 불참한 사람과 계성전 제사 때 향을 지송치 않은 사람을 탄핵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소(疏) 3통(通)을 올리었는데, 하나는 취각(吹角)을 듣고 대궐에 나오지 않는 죄를 청한 것이고, 하나는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 박질(朴質)이 취각(吹角)하는 날에 허위로 동료(同僚) 직장(直長) 김오문(金五文)의 이름에 서명한 죄를 청한 것이고, 하나는 계성전(啓聖殿) 향상(向上) 이창(李敞) 등이 제사를 행하는 날을 당하여 내향(內香)을 지송(祗送)하지 않은 죄를 청한 것이다. 박질은 다른 일을 면제하고 태(笞) 50대를 속(贖)받고 복직시키고, 이창의 죄는 율에 의하여 속을 거두고 환임(還任)시키고 취각(吹角)할 때에 이르지 아니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유현(兪顯) 등 11인은 모두 면직하고, 그 나머지 조온(趙溫)‧윤곤(尹坤)‧김우(金宇)‧송거신(宋居信)과 신병이 있는 사람, 말에서 떨어진 사람 등은 아울러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5)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1월 10일 을미 2번째 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개천 도감 제조를 더 증설하다
개천 도감 제조(開川都監提調)를 더 두었는데, 남성군(南城君) 홍서(洪恕)‧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총제(摠制) 김중보(金重寶)‧유습(柳濕)‧이지실(李之實)‧김만수(金萬壽)‧유은지(柳殷之)‧이안우(李安愚)‧황녹(黃祿) 등이고, 또 사(使)와 판관 33인을 더 두었다.
16)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4일 기사 2번째 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김을우‧김우‧윤향‧하경복‧윤임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을우(金乙雨)를 경상도 수군 도절제사(慶尙道水軍都節制使)로, 김우(金宇)를 안주도 병마 도절제사(安州道兵馬都節制使)로, 윤향(尹向)을 계림 부윤(鷄林府尹)으로, 하경복(河敬復)을 경성 등처 병마 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로, 윤임(尹臨)을 제주도 도안무사(濟州道都安撫使)로, 이육(李稑)을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로 삼았다. 전번에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윤회종(尹會宗) 등이 심정(沈泟)의 죄를 청하였으므로 모두 사제(私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었는데, 지금 모두 파면하고 심정을 다시 상호군(上護軍)으로 삼았다.
17)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0월 16일 임술 5번째 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이성 절제사 김우가 관물로써 중국과 사무역을 하였으나 공신이기에 용서하다
형조에서 이성 절제사(泥城節制使) 김우(金宇)의 죄를 청하였다.
“김우가 군사를 이끌고 남의 나라 땅에서 사냥하였고, 또 관중(官中)의 인삼을 가지고 중국의 물건과 무역하여 사용(私用)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 아비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여러 군(郡)에서 부의로 종이와 초[燭]를 구하였습니다. 이를 죄 주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니, 공신(功臣)인 때문이었다. 형조에서 또 청하였다.
“김효렴(金孝廉)이 자주(玆州)의 수령관을 지낼 때 관아 안의 노비를 소관 영사(令史) 순주(順州) 사람 김여해(金呂海)의 집에다 주어 누에를 기르게 하였고, 또 김여해를 백호(百戶)로 정하였으니, 그 간특하고 탐오하여 청렴하지 못함이 심하였습니다.”
순금사에 내려 법률에 의해 과죄(科罪)하라고 명하였다.
18)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2월 28일 신묘 2번째 기사 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이원‧이화영‧황희‧성발도‧조용‧박자청‧정역‧심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원(李原)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화영(李和英)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황희(黃喜)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성발도(成發道)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용(趙庸)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박자청(朴子靑)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정역(鄭易)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심온(沈溫)을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로, 김우(金宇)를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로 삼고, 검교 의정부 참찬(檢校議政府參贊) 하나를 더 설치하였다.
19)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0월 12일 경오 1번째 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명 황제가 남경에 돌아왔으므로 문안사 희천군 김우를 경사에 보내다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를 보내어 경사(京師)에 갔으니, 황제가 남경(南京)에서 환가(還駕)하였으므로 기거(起居)를 흠문(欽問)하고자 함이었다. 석등잔(石燈盞) 큰 것과 작은 것 아울러 10개를 부쳐 보내어 진헌하였다.
20)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5월 6일 신묘 1번째 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경사에 가서 밀무역 등으로 명예를 실추시킨 원민생‧장유신 등을 의금부에 가두다
원민생(元閔生)‧장유신(張有信)‧김타(金沱)‧김언용(金彦容)‧오의(吳義)‧강상부(姜尙傅)를 의금부에 가두었다. 의정부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원육전(元六典)》 호전(戶典)내에, ‘부경 사신(赴京使臣)의 행차(行次)에 모리(謀利)하는 사람이 중국으로 나아가 몰래 매매를 행하여 〈국가에〉 오욕(汚辱)의 이름을 가져오게 하면 관계가 적지 아니하니, 진헌 방물(進獻方物), 노차 반전(路次盤纏), 의복(衣服) 이외의 잡물(雜物)은 모조리 몰관(沒官)하고, 그 모리(謀利)하는 사람이 끌고 가던 마필(馬匹)도 아울러 각참(各站)에 소속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정조 진표사(正朝進表使) 이도분(李都芬)과 진전사(進箋使) 이발(李潑) 등은 많은 사물(私物)을 가지고 가서 매매를 자행하여 중국에서 웃음거리가 되게 함으로써 상명(上命)을 욕되이 하였으니 일이 대체(大體)에 관계됩니다. 헌부(憲府)에서 4월 25일 유사(宥赦) 전의 일이라 하여 그 죄를 묻지 말도록 하여,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시어 단지 직임만 정지케 하였으나, 이도분‧이발‧장유신‧김언용 등을 유사(攸司)에 두어 그 이유를 국문(鞫問)함으로써 국법[邦憲]을 바르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의금부에 명하여, 이도분·이발 이외는 모두 가두어 국문하고, 근수(根隨) 매매인(買賣人)과 끌고 간 마필(馬匹)은 《원육전(元六典)》에 의하여 참(站)에 속하게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국문(鞫問)할 때에 그 물주(物主)는 추핵(推劾)하지 말고 단지 그 매매한 필수(匹數)만 물어 모조리 속공(屬公)케 하라.” 하니, 조말생이,
“신 등의 생각은 물주도 국문하여 모두를 징계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함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이도분‧이발 및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 등이 혹은 장삿군의 은정(銀丁)을 받기도 하고, 혹은 채단(綵段)도 받아 들이고 이어서 그들을 데리고 중국(中國)으로 가게 되니, 전수(轉輸)하는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21)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5월 10일 을미 2번째 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흠문기거사‧통사‧압물 등의 처벌에 대해서도 지시하다
사헌부에 명하여, 흠문 기거사(欽問起居使)‧통사(通事)‧압물(押物)‧타각부(打角夫)‧종인(從人) 등이 매매를 범람하게 한 사상(事狀)을 추핵(推覈)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김우(金宇) 등이 중국에 입조(入朝)하여 무역한 잡물은 모두 관에서 몰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김우 이외의 서장관(書狀官)‧통사(通事)‧압물(押物) 등이 무역한 잡물은 반(半)을 관에서 몰수하고, 종인(從人)이 무역한 물건은 모조리 관에서 몰수하라.”
22)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윤5월 12일 정묘 3번째 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형조 판서 권진을 흠문기거사로 북경에 보내다
“흠문사(欽問使)는 황엄이 아는 부마(駙馬)나 종친(宗親)‧대신(大臣)을 보냄이 좋겠습니다. 권진(權軫)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조말생이,
“예전에 한상경(韓尙敬)이 호조 판서가 되었을 때,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로 경사(京師)에 갔고,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도 또한 같았습니다. 이것은 본시 예(例)입니다.” 하니, 한상경이,
“신은 황제가 북정(北征)하였을 때 봉사(奉使)로 행재(行在)에 나아갔었고, 김우가 간 것은 황제가 남경(南京)으로 환행(還幸)한 뒤에 있었으니, 남경과 우리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 황제가 가까이 북경에 행행하였으니, 어찌 권진을 보내어 희기(喜氣)를 폄이 옳겠습니까?” 하고, 박은이,
“인정(人情)은 가까우면 꼭 친히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친조(親朝)하실 수 없다면 중신(重臣)으로 대신 가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 등의 말은 크게 옳다. 진실로 청납(聽納) 해야 마땅하나, 한상경과 김우도 또한 이러한 사신을 하였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종친이나 부마·대신을 보내어 예를 세움[立例]은 옳지 못한 것이다. 또 황엄이 아는 종친이란 한두 사람이 있을 뿐이니, 비록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내더라도 해될 것은 없다.” 하니, 유정현 등이 말하였다.
“상교(上敎)가 옳습니다. 어찌 황엄이 알고 모르는 데 구애되겠습니까? 또 타국(他國)의 대신(大臣)을 황엄이 다 알 수 있겠습니까?”
23)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11월 22일 계유 1번째 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전 부정 강호의 죄를 논하다
전 부정(副正) 강호(姜湖)를 형조(刑曹)에 내리어 죄를 논하였다. 강호가 일찍이 김우(金宇)의 반인(伴人)으로서 중국 경사(京師)에 갔을 때, 많이 포물(布物)을 가지고 가서 지나치게 흥리(興利)를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관가에 몰수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물건을 도로 받고자 하여 북을 쳐서 신소(申訴)한 때문이었다.
강호는 본래 장사하는 사람이었다.
24)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2월 19일 경자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희천군 김우의 졸기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가 졸(卒)하였다. 김우는 희천(熙川)의 토호(土豪)요, 강계 만호(江界萬戶) 김영비(金英庇)의 아들이었다. 옛 이름은 김도길(金都吉)인데, 무재(武才)가 있었으나 글자를 알지 못하였고,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시종(侍從)의 노고가 있었고, 임금이 즉위하게 되자 좌명 공신(佐命功臣)의 열(列)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양정(襄靖)이라 시호를 주었다.
25) 세종실록 33권, 세종 8년 8월 2일 계해 6번째 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예조 참판 이명덕이 증회받은 사실과 서반의 관작 임명의 과람함을 논의하다
대사헌 권도(權蹈)가 계하기를,
“예조 참판 이명덕(李明德)이 일찍이 병조 참판으로 있을 때에, 김효지(金孝知)의 산호영(珊瑚纓)의 증회를 받은 사실이 있어, 본부(本府)에서 이를 탄핵하온바, 이명덕이 답하기를, ‘내가 좋은 말[馬]로 그 값을 주었다. ’고 하였습니다. 효지는 이미 죽었고, 그 아우 김유지(金有知)는 말하기를, ‘부친 김우(金宇)가 생존해 있을 때에, 명덕이 부친으로부터 자류(紫騮)의 큰 말을 받은 바 있는데, 명덕이 좋은 말을 주었다는 것은 곧 이 자류마(紫騮馬)의 값인 것이다. 산호의 값은 어찌 좋은 말뿐이겠는가.’ 하니, 그 본정을 살피건대 명덕이 그 증회를 받았음이 명백합니다. 또 서반(西班)의 관작이 많이 명덕의 손에서 나왔는데, 8품의 갑사(甲士)가 번(番)에서 내려갈 때에는 7품을 받고, 7품은 6품을 받아, 3, 4년 사이에 4, 5품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직임 없는 사람이 집에 물러가 앉아 있는데도 그의 현부(賢否)를 묻지 않고 멀리서 그 관직을 임명하였으니, 관작의 과람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성대(聖代)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그 재물을 탐하고 관직을 더럽힌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호(珊瑚)를 받은 사실은 사명(赦命)이 반포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 논하지 않는 것이 옳고, 멀리 있는 자에게 그 관직을 준 데에 이르러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26)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0월 20일 무술 4번째 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황상 등에게 더욱 엄한 벌을 내리라고 상소하다
대사헌 조계생(趙啓生) 등이 상소하기를,
“황상은 젊어서부터 아첨하느라고 듣기 좋게 꾸미는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낯빛[巧言令色]으로 사람들에게 좋게 보여 왔고, 교만하고 음탕한 행동을 방자히 행하여 유협(遊俠)의 명칭을 얻었으며, 전에 김우(金宇)와 더불어 첩을 서로 다투어서 더러운 소문이 중외에 자자하게 들리어 식자(識者)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사온데, 외람하게도 권고(眷顧)를 받아 정부·육조에 초탁(超擢) 천전하여 중론(衆論)을 놀라게 하였으니, 마땅히 개심(改心)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여 마음과 생각을 세척하고 명예와 절조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제 모상(母喪)을 당하여 바야흐로 최질(衰絰)의 복중에 있으면서 슬픈 것을 잊고 여색에 빠져 비밀히 창기(娼妓)를 불러 남몰래 빈소(殯所) 곁에서 간음(奸淫)한 바 있고, 총묘(塚墓)의 흙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두 번이나 창기의 집에 가서 음행을 마음껏 행하였으되 기탄 없었으니, 그 행동은 마치 금수와도 같은 것이어서, 이미 사람이 아니온데, 또 질투심을 발로하여 밤중에 기생집에 이르러서 머리를 자르고 옷을 벗기고는 몸소 때려서 상처를 내게 했으니, 그 대륜(大倫)을 어지럽히고 강상(綱常)을 무너뜨림이 이보다 심한 것은 일찍이 있지 않았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충신(忠臣)은 효자의 가문에서 난다.’ 하였사온데, 오늘의 소행으로 본다면 황상이 평일에 성상께 향한 마음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이순몽(李順蒙)은 천성이 광혹(狂惑)하고, 또 재능과 행실이 없는데도 다만 공신의 맏아들이라 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나, 일찍이 근신함이 없었고, 여색을 탐하여 감순(監巡)하는 날은 임의로 직소(直所)를 떠나 평복[微服]차림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피하여〉 도보로 가서 황상의 첩을 도둑질하여 간통하다가 드디어 머리를 깎이고 옷을 벗기게 되는 등 그 몸을 욕되게 하였으니, 그 마음과 행실을 논하면 시정(市井)의 무리보다 심하오며, 더군다나 황상은 충의(忠義)를 같이 맹서하여 그 친의(親誼)가 형제와도 같은 사이에 감히 짐승의 마음을 품고 차마 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으니, 어찌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또 일이 발각된 뒤에도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조정에 낯을 들고 나왔고, 또 기생을 빼앗아 그의 사저(私邸)에 데려다 두었으니, 그 파렴치한 마음도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다만 황상을 장형에 처하고, 순몽을 외방으로 내쫓는 것으로 그친다면 밝으신 조정의 악한 자를 징계하고 풍속을 가다듬는 의의가 아닌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바라옵건대 명을 내리시와 황상을 밖으로 내쫓고, 순몽의 직첩을 거두시고, 이로써 황음(荒淫)한 무리를 징계하고 강상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상소한 말 가운데 불경(不敬)한 말이 있다 하여, 조계생과 집의(執義) 안숭선(安崇善)‧장령(掌令) 송포(宋褒)‧조서강(趙瑞康)‧지평(持平) 김경(金俓)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소(疏) 가운데 말한바 김우와 다툰 첩이란 바로 창기(娼妓) 가이(加伊)이니, 그는 뒤에 태종이 노래를 잘한다 하여 궁중에 들이어 총애한 바 있고 드디어 옹주(翁主)로 봉하였는데, 그것을 말하여 ‘더러운 이름이 중외에 자자하게 들리어 식자들이 수치스럽게 여겼다.’ 하여, 신하로서 휘피(諱避)해야 할 의리에 어김이 있다 하여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27)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0월 22일 경자 2번째 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조계생·안숭선·송포·조서강·김경의 치죄에 대해서 논의하다
의금부에서 조계생(趙啓生)‧안숭선(安崇善)‧송포(宋褒)‧조서강(趙瑞康)‧김경(金俓)의 죄안을 갖추어 여쭈니, 명하여 좌의정 황희(黃喜)‧우의정 맹사성(孟思誠)‧예조 판서 신상(申商)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이제 헌부에서 황상과 이순몽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한 것은 그럴 듯하나, 그러나 그 상소 내용에는 사유(赦宥) 전의 일을 언급하였고, 또한 태종 때의 일도 감히 거론(擧論)하였다. 홍(洪)씨가 궁중으로 들어와 선왕을 모신지라, 봉하여 옹주(翁主)를 삼았는데, 만약에 선왕이 생존해 계신다면 어찌 이런 소리를 감히 아울러서 발론할 것인가. 내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노라. 헌부의 말은 황상의 일 때문에 발언한 것이나, 안숭선이 처음에 황상의 범한 일들을 발언해 놓고, 바로 또 말하기를, ‘황상과 김우(金宇)가 첩을 다툰 사건이 바로 임금을 간범(干犯)한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가.’ 하니, 조계생이 말하기를, ‘비록 임금을 간범하였다 하더라도 홍씨를 배척해서 말하지 않았으니,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므로, 이에 전체의 대관이 말을 합하여 죄를 청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는가.”
하니, 황희·맹사성 등이 대답하기를, “황상의 일로 인하여 이 말을 발론한 것은 잠시 살핌을 잃은 것입니다. 경하게 하려면 파직(罷職)에 처하시고, 중하게 하려면 부처(付處)에 처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고, 신상은 말하기를,
"경들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으니, 내가 절충해서 처리하겠노라." 하고, 좌대언(左代言) 김자(金赭)에게 명하기를,
"이 사건은 그 말이 선왕과 관계되니, 내가 독단하여 용서할 일이 아니다. 대저 한 관아의 일이란 반드시 행수(行首)와 장무(掌務)가 이를 알아서 하는 바이며, 더욱이 이글은 장무 조서강이 붓을 잡고, 대사헌이 승락하여 이룬 것으로서 죄는 행수와 장무에게 있으니, 모두 외방에 부처(付處)하는 것이 옳다."
하고, 드디어 계생은 직산(稷山)으로, 서강은 강음(江陰)으로 각기 부처하게 하고, 안숭선과 송포와 김경은 관직을 파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