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ㆍ정종ㆍ태종실록
(자헌대부 병조판서 희천군 휘 우, 資憲大夫 兵曹判書 熙川君 諱 宇)
1)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6월 28일 경인 1번째 기사 / 사헌부에서 첩으로 아내를 삼은 김우와 함부로 과전을 받은 변옹을 탄핵하다.
헌사에서 장군(將軍) 김우(金宇)가 아내를 버리고 첩을 대신 아내로 삼은 것과 전 예안 감무(禮安監務) 변옹(卞雍)이 함부로 과전(科田)을 받은 죄를 탄핵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우(宇)는 파직시키고, 옹(雍)은 외방으로 귀양 보내었다.
2)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 6번째 기사 / 조사의ㆍ이염 등을 옥에 가두고 정진 등을 충군하고 이조 등을 귀양보내다.
전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사의(趙思義)ㆍ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ㆍ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ㆍ이조 의랑(吏曹議郞) 이조(李慥)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정진(鄭津)과 강택(康澤)을 전라 수군(全羅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대장군 한규(韓珪)ㆍ손원만(孫原萬)ㆍ송천우(宋千佑)를 경상 수군(慶尙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사복경(司僕卿) 이보검(李寶劍)과 장군 임득방(任得邦)은 강원 수군(江原水軍)에 충군(充軍)하고, 전 장군 하승해(河承海)를 풍해 수군(豊海水軍)에 충군(充軍)하고, 목인해(睦仁海)ㆍ박미(朴????)ㆍ이천우(李千祐)는 청해 수군(靑海水軍)에 충군(充軍)하며, 이조(李慥)를 흥덕진(興德鎭)으로, 강계권(康繼權)을 각산(角山)으로, 정신의(鄭臣義)를 영해진(寧海鎭)으로, 오몽을(吳蒙乙)을 이산진(伊山鎭)으로, 장군 조홍(趙洪)과 전 장군 이등(李登)을 순성진(蓴城鎭)으로, 군자감(軍資監) 김우(金宇)와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남포진(藍浦鎭)으로 귀양보내고, 김사행(金師幸)과 조사의(趙思義) 등 21인을 사유(赦宥)하였다.
3)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 갑오 3번째 기사 /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생략) 선죽(善竹) 노상(路上)에 이르니, 한규(韓珪)ㆍ김우(金宇) 등의 탄 말이 화살에 맞아 퇴각하여 달아났다. 이숙번이 한규에게 이르기를, “네 말이 죽게 되었으니, 곧 바꿔 타라!”하고, 김우(金宇)에게 이르기를, “네 말은 상하지 않았으니, 빨리 되돌아가서 싸우라!”하고, 이숙번이 달려서 양군(兩軍) 사이로 들어가니, 서귀룡 (徐貴龍)이 또한 먼저 들어가서 이숙번을... (중략) [註] 제4편 제3장 103쪽부터 112쪽에 전체를 수록하였음.
4)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1월 15일 을해 2번째 기사 / 이저ㆍ이거이 등에게 좌명 공신의 훈호를 내리는 교서
(생략) 대장군(大將軍) 연사종(延嗣宗)ㆍ한규(韓珪)ㆍ김우(金宇)ㆍ문빈(文彬), 전 중군 장군(中軍將軍) 윤목(尹穆) 등 22인은 정성을 바쳐 협찬(協贊)하고, 오래 조호(調護)를 부지런히 하여 익대 좌명하였고, 군자 소감(軍資少監) 송거신(宋居信)은 위태로움을 당해 환(患)을 구제하여 익대 좌명하였으니, 4등으로 칭하하고, 부ㆍ모ㆍ처를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음직을 주고 밭 60결, 노비 6명... (중략) [註] 제4편 제3장 113쪽부터 116쪽에 전체를 수록하였음.
5)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1월 25일 갑진 2번째 기사 / 이거이ㆍ이숙번ㆍ민무질 등에게 군직을 제수하다.
이거이(李居易)로 좌도 도통사(左道都統使)를, 이숙번(李叔蕃)으로 도진무(都鎭撫)를, 민무질(閔無疾)로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이지(李至)ㆍ곽충보(郭忠輔)ㆍ이행(李行)ㆍ한규(韓珪)로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를 삼고, 김우(金宇)ㆍ 심귀령(沈貴齡)ㆍ이순(李淳)ㆍ최사위(崔士威)는 김계지(金繼志)와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발행(發行)하게 하였다.
6) 태종실록 10권, 태종 5년 8월 23일 병술 2번째 기사 / 사헌 집의 윤향이 신극례 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헌 집의(司憲執義) 윤향(尹向)이 신극례(辛克禮)와 신씨(辛氏)ㆍ김씨(金氏) 등의 죄를 청하였으나,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정희계(鄭熙啓)의 처 신씨(辛氏)와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의 처 김씨(金氏)가 밤이면 조화(趙禾)의 처 김씨(金氏)의 집에 모이는데, 신씨(辛氏)의 아우인 취산군(鷲山君) 극례(克禮)가 매양 이에 참여하여 추(醜)한 소문이 밖에까지 흘러나왔다. 향(向)이 상소하여 극례와 신씨ㆍ김씨 등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극례는 공신이고 화(禾)는 준(浚)의 형에 아들이라 하여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다.
7)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8월 24일 을사 1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귀경길에 역참의 모든 닭·개를 매에게 먹인 희천군 김우의 죄를 청하다.
사헌부에서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의 죄를 청하였다.
김우가 강계도병마사(江界都兵馬使)를 파하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매[鷹子]를 가진 것이 많아 30여 련(連)이나 되니, 지나는 군현(郡縣)의 참(站)ㆍ역(驛)에 닭과 개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그 죄를 바루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김우는 공신이니, 비록 범한 것이 있어도 죄를 가할 수 없다.”
8)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0월 3일 계미 1번째 기사 / 둘째 아들 이호를 효령군으로 봉하다. 의정부 찬성사ㆍ형조 판서ㆍ대사헌 등의 임명
제2자(第二子) 이호(李祜)를 봉하여 효령군(孝寧君)을 삼고, 이직(李稷)으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임정(林整)으로 형조 판서를, 안원(安瑗)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연사종(延嗣宗)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겸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김우(金宇)로 희천군(熙川君) 겸 좌군 총제(左軍摠制)를, 윤향(尹向)으로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강회중(姜淮仲)ㆍ유두명(柳斗明)으로 좌ㆍ 우사간 대부(左右司諫大夫)를 삼았다. 대간(臺諫)이 모두 벼슬이 파면되었으나, 윤향만이 홀로 천직(遷職)되었다.
9)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2월 2일 신사 1번째 기사 / 대호군 황상을 파직하고, 총제 김우의 갑사 양춘무 등을 수군에 편입시키다.
대호군(大護軍) 황상(黃象)을 파직시키고, 갑사(甲士) 양춘무(楊春茂) 등 네 사람을 수군(水軍)에 편입시켰다. 처음에 황상이 상기(上妓)349) 가희아(可喜兒)를 첩으로 삼았는데, 총제(摠制) 김우(金宇)도 또한 일찍이 가희아와 정을 통하였었다. 동짓날 내연(內宴)이 파하자, 가희아가 궁문(宮門)을 나와 황상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김우가 부하 갑사(甲士)와 종인(從人)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리다가 탈취(奪取)하려 하였으나 붙잡지 못하고, 뒤쫓아 황상의 집에 이르러 수색하였으나 또한 잡지 못하였다. 이튿날 황상(黃象)이 가희아(可喜兒)로 하여금 말을 타고 종을 거느리고 저자[市]를 지나가게 하였는데, 김우(金宇)가 또 갑사(甲士)와 복종(僕從)을 보내어 기다리게 하므로, 황상이 말을 달려 장(杖)을 가지고 쫓으니, 갑사(甲士)와 종인(從人)이 모두 흩어지고, 구경꾼이 담장처럼 늘어섰다. 도로(道路)에서 말이 전해져 소문이 났으나, 핵문(劾問)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임금이 듣고 사헌 지평(司憲持平) 김경(金庚)을 불려 명령하였다.
“내연(內宴)에 정재(呈才)하는 상기(上妓)를 간혹 제 집에 숨겨 두고 제 첩(妾)이라 하여, 항상 내보내지 않는 일이 있다. 내가 일찍이 얼굴을 아는 기생도 내연(內宴)에 혹 나오지 않는 자가 있어, 정재(呈才)에 궐원(闕員)이 생긴다. 그것은 족히 말하잘 것이 없지마는, 제 집에 숨겨 두고 ‘제 첩이라’고까지 하는 것은 어떻다 하겠는가! 너는 마땅히 거론하여 탄핵해 아뢰라.”
수일이 지난 뒤에 장령(掌令) 탁신(卓愼)을 불러 명령하였다.
“이제 들으니, 상기(上妓)의 연고로 말미암아 탄핵을 당한 자가 많다고 하는데, 전날 내가 말한 것은 여러 해 동안 제 집에 숨겨 두고 외출하지 못하게 하는 자를 가리킨 것이고, 조관(朝官)이 상기(上妓)를 첩으로 삼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하구(河久)·김우(金宇)는 이미 출사(出仕)하게 하였으니, 너는 그리 알라!” 탁신이 아뢰기를,
“김우의 죄는 하구와 같지 않습니다. 대저 대낮에 큰길 가운데서 금군(禁軍)을 보내어 사사 싸움을 시켰으니, 이 버릇이 자라고 그치지 않는다면, 후일에 난을 꾸미는데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김우는 공신이니 치죄(治罪)할 수 없고, 꾀어서 나쁜 짓을 하도록 이끈 자를 핵실(覈實)하여 아뢰라!”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아뢰었다.
“지난 11월 12일 밤에김우(金宇)가자기 소관(所管)인 갑사(甲士) 가운데 기병(騎兵)·보병(步兵) 30여 명을 보내어 황상(黃象)의 집을 포위하고, 갑사 나원경(羅原冏)ㆍ고효성(高孝誠) 등이 곧장 황상의 내실(內室)에 들어가 기생첩 가희아(可喜兒)를 찾았으나 잡지 못하니, 그 의장(衣裝)을 취하여 갔습니다. 이튿날 김우가 다시 구종(丘從)과 조례(皂隷)를 보내어 가희아를 빼앗아 오게 하여, 수진방(壽進坊) 동구(洞口)에 이르니, 황상이 듣고 말을 달려 장(杖)을 가지고 추격하여 가희아를 뒤쫓았습니다. 이리하여 김우가 즉시 주번 갑사(晝番甲士) 양춘무(楊春茂)ㆍ고효성(高孝誠)·박동수(朴東秀) 등 10여 명과 사반(私伴) 20여 명을 발하여, 장(杖)을 가지고 황상과 더불어 서로 싸웠는데, 양춘무가 황상을 쳐서 은대(銀帶)가 깨어져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군정(軍政)은 엄한 것을 주장으로 삼아 각각 그 분수를 지킨 뒤에야, 상하(上下)가 서로 편안하고, 계급 사이에 서로 능멸하거나 범(犯)하지 아니하여, 위에서는 능히 명령을 내고 아래에서는 잘 복역(服役)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근심이 영원히 없어질 것입니다. 김우는 미천한 집안에서 출신하여 별로 재주와 덕이 없는데, 후하게 주상의 은혜를 입어서 벼슬이 총제(摠制)에 이르렀으니, 날로 더욱 근신하여 주상의 은혜를 갚기를 도모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일 터인데, 의리를 돌보지 않고 불법한 짓을 자행하여 마음대로 금군(禁軍)을 발하여 남의 첩을 빼앗았으니, 이것이 큰 난(亂)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양춘무(楊春茂) 등은 금군(禁軍)이 된 몸으로 도리어 김우(金宇)의 사분(私忿)에서 나온 명령을 따라, 밤에 황상의 집을 포위하였고, 또 길거리에서 서로 더불어 격투하여 그 은대(銀帶)를 쳐서 떨어뜨렸으니 실로 부당합니다. 황상(黃象)은 작지 않은 3품관으로서 장(杖)을 가지고 말을 달려 조정길[朝路]에서 기첩(妓妾)을 다투었으니, 빌건대, 김우(金宇)의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그 죄를 밝게 바루어서 난의 근원을 막으시고, 양춘무(楊春茂)·고효성(高孝誠)·박동수(朴東秀)·나원경(羅原冏)은 직첩을 회수하고 율에 의하여 논죄하고, 황상(黃象)도 또한 정직(停職)시켜서 선비의 풍습을 고치게 하소서.” 임금이 명하기를,
“황상은 파직시키고, 양춘무 등 네 사람은 각각 본향(本鄕)의 수군(水軍)에 편입하고, 가희아는 장(杖) 80대를 수속(收贖)하게 하고, 김우는 공신이니 거론하지 말라.”하니, 사헌부에서 또 아뢰었다.
“김우(金宇)는 작년에 강계 병마사(江界兵馬使)로 있을 때에 탐욕(貪慾)을 자행하였고, 체대(遞代)를 당하여 서울로 올라올 때에 반인(伴人)을 많이 거느리고 역참(驛站)마다 유숙하면서 개와 닭을 도살하여, 폐해가 백성에게 미쳤으므로, 본부(本府)에서 그 죄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그 작은 공로를 생각하시어 내버려두고 논하지 말게 하셨으니, 진실로 마땅히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주상의 은혜를 갚기를 도모해야 할 터인데, 전의 마음을 고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죄를 짓더라도 반드시 은유(恩宥)를 입으리라.’ 여기고, 강포(强暴)한 짓을 방자히 하여 임의로 금병(禁兵)을 발하여 밤중에 남의 집을 포위하고, 그 기생첩을 강탈하여, 대낮에 조로(朝路)에서 떼를 지어 난동을 부리기에 이르렀으니, 정상과 범죄가 심중(深重)합니다. 만일 또 죄책을 가하지 않으면, 지난 일을 징계하는 바가 없어 뒷날에는 장차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빌건대, 김우(金宇)를 한결같이 전일의 장신(狀申)한 바와 같이 시행하소서.”
소(疏)가 올라가니, 대내(大內)에 머물러 두었다.
10)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5월 18일 병인 1번째 기사 / 희천군 김우 등을 경기좌ㆍ우도에 나누어 보내 왜적을 방비하게 하다.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 등을 경기좌ㆍ우도(京畿左右道)에 나누어 보냈으니 왜적(倭賊)을 막기 위함이었다. 김우(金宇)로 경기우도(京畿右道) 교동(喬桐) 등처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김귀보(金貴寶)로 조전 첨절제사(助戰僉節制使)를, 김만수(金萬壽)로 좌도(左道) 연흥(延興)ㆍ자월(紫月) 등처 수군 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최용화(崔龍和)로 조전 첨절제사를, 조비형(曹備衡)으로 경기 좌도(京畿左道) 대진(大津) 등처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삼고, 호군(護軍) 이도(李韜)로 경기 좌도 병선 군기 점고 별감(京畿左道兵船軍器點考別監)을 군기 주부(軍器注簿) 최해산(崔海山)으로 경기우도 병선 군기 점고 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을 삼아 즉일(卽日)로 길을 떠나게 하고 이관(李灌)으로 사헌 집의(司憲執義)를, 권헌(權軒)ㆍ신간(申簡)으로 장령(掌令)을 삼고 권우(權遇) 등은 모두 면관(免官)시켰다.
11)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7월 8일 갑인 2번째 기사 / 김우ㆍ권충ㆍ박영 등을 각 지방 도병마사 등의 관직에 임명하다.
김우(金宇)로 강계(江界) 등처 도병마사(都兵馬使)ㆍ판강계부사(判江界府事)를, 권충(權衷)으로 이성(泥城) 등처 도병마사(都兵馬使)ㆍ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事)를, 박영(朴齡)으로 길주도 찰리사(吉州道察理使) 겸 판길주목사(判吉州牧事)를, 한흥보(韓興寶)로 경원(慶源) 등처 병마사(兵馬使) 겸 경원 부사(慶源府使)를, 윤사수(尹思修)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ㆍ 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를, 이간(李衎)으로 강원도 병마 도절제사(江原道兵馬都節制使)ㆍ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를, 함부림(咸傅霖)으로 풍해도 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ㆍ판황주목사(判黃州牧事)를, 김계지(金繼志)로 풍해도 병마 도절제사(豐海道兵馬都節制使)ㆍ판해주목사(判海州牧事)를 삼았으니, 모두 의정부(議政府)에서 입초(入抄)한 것을 가지고 낙점(落點)하여 차견(差遣)한 것이었다. 가족(家族)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12)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2월 22일 을미 2번째 기사 / 강계에 있을 때 요동에 밀무역한 희천군 김우를 탄핵
사헌부(司憲府)에서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의 죄를 청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김우가 일찍이 강계(江界)에 부임하여 초피(貂皮) 50장과 황랍(黃蠟) 16근을 가지고 비밀히 통사(通事) 박지성(朴之成)에세 부탁하여, 요동(遼東)에 가서 초피 10장으로는 능(綾) 2필을 사고, 20장으로는 중견(中絹) 10필을 샀습니다. 박지성이 돌아오니, 김우가 이미 벼슬이 갈렸으므로, 길에서 만나 능(綾)ㆍ견(絹)과 남은 초피 20장을 김우에게 되돌려 주고, 다만 황랍만 강계부(江界府)에 도로 바쳤습니다. 본부(本府)에서 그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이문(移文)하여 이 사실을 갖추 알아냈습니다. 김우가 금하는 물건을 함부로 거두어 국경을 넘어 매매한 죄는, 이를 엄하게 징계하여 후인을 징계함이 마땅합니다.” 임금이 소장을 대내(大內)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 아니하였다.
13)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0월 27일 을축 5번째 기사 / 11도에 도절제사 각 1인과 그 밑에 절제사 또는 첨절제사를 임명하다.
11도(道)에 도절제사(都節制使) 각 한 사람을 두고,그를 보좌하는 자는 가선(嘉善) 이상은 절제사(節制使)를 삼고, 통정(通政) 이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삼았다. 상주ㆍ진주도(尙州晉州道)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과 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이고, 계림(雞林)ㆍ안동도(安東道)는 여산군(麗山君) 김승주(金承霔)와 전 절제사(節制使) 조완(曹緩)이고,전라도(全羅道)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과 회령군(會寧君) 마천목(馬天牧)ㆍ총제(摠制) 조흡(曹洽)이고, 충청도(忠淸道)는 도총제(都摠制) 김남수(金南秀)와 총제(摠制) 조질(趙秩) 성발도(成發道)이고, 경기좌도(京畿左道)는 안원군(安原君) 한장수(韓長壽)와 전 절제사(節制使) 유습(柳濕)ㆍ전 첨총제(僉摠制) 박지(朴芷)이고,경기우도(京畿右道)는 도총제(都摠制) 정진(鄭鎭)과 첨절제사(僉節制使) 강유신(康有信)ㆍ홍부(洪敷)이고, 풍해도(豐海道)는 전 절제사(節制使) 김계지(金繼志)와 김중보(金重寶)ㆍ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이고, 강원도(江原道)는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심인봉(沈仁鳳)과 전 총제(摠制) 이승간(李承幹)ㆍ전 첨총제(僉摠制) 문효종(文孝宗)이고, 동북면(東北面)은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과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ㆍ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화영(李和英)이고, 평양도(平壤道)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과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ㆍ총제(摠制) 이지실(李之實)이고, 안주도(安州道)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와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 동지총제(同知摠制) 김만수(金萬壽)이다. 또 첨총제(僉摠制) 문천봉(文天奉)과 상호군(上護軍) 김옥(金玉)으로 동북면(東北面) 별패(別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14)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12월 12일 무술 2번째 기사 / 사헌부에서 취각할 때 불참한 사람과 계성전 제사 때 향을 지송치 않은 사람을 탄핵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소(疏) 3통(通)을 올리었는데, 하나는 취각(吹角)을 듣고 대궐에 나오지 않는 죄를 청한 것이고, 하나는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 박질(朴質)이 취각(吹角)하는 날에 허위로 동료(同僚) 직장(直長) 김오문(金五文)의 이름에 서명한 죄를 청한 것이고, 하나는 계성전(啓聖殿) 향상(向上) 이창(李敞) 등이 제사를 행하는 날을 당하여 내향(內香)을 지송(祗送)하지 않은 죄를 청한 것이다. 박질은 다른 일을 면제하고 태(笞) 50대를 속(贖)받고 복직시키고, 이창의 죄는 율에 의하여 속을 거두고 환임(還任)시키고, 취각(吹角)할 때에 이르지 아니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유현(兪顯) 등 11인은 모두 면직하고, 그 나머지 조온(趙溫)ㆍ윤곤(尹坤)ㆍ김우(金宇)ㆍ송거신(宋居信)과 신병이 있는 사람, 말에서 떨어진 사람 등은 아울러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5)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1월 10일 을미 2번째 기사 / 개천 도감 제조를 더 증설하다.
개천 도감 제조(開川都監提調)를 더 두었는데, 남성군(南城君) 홍서(洪恕)ㆍ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ㆍ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ㆍ총제(摠制) 김중보(金重寶)ㆍ유습(柳濕)ㆍ이지실(李之實)ㆍ김만수(金萬壽)ㆍ유은지(柳殷之)ㆍ이안우(李安愚)ㆍ황녹(黃祿) 등이고, 또 사(使)와 판관 33인을 더 두었다.
16)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4일 기사 2번째기사 / 김을우ㆍ김우ㆍ 윤향ㆍ하경복ㆍ윤임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김을우(金乙雨)를 경상도 수군 도절제사(慶尙道水軍都節制使)로, 김우(金宇)를 안주도 병마 도절제사(安州道兵馬都節制使)로, 윤향(尹向)을 계림 부윤(鷄林府尹)으로, 하경복(河敬復)을 경성 등처 병마 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로, 윤임(尹臨)을 제주도 도안무사(濟州道都安撫使)로, 이육(李稑)을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로 삼았다. 전번에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윤회종(尹會宗) 등이 심정(沈泟)의 죄를 청하였으므로 모두 사제(私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었는데, 지금 모두 파면하고 심정을 다시 상호군(上護軍)으로 삼았다.
17)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0월 16일 임술 5번째 기사 / 이성 절제사 김우가 관물로써 중국과 사무역을 하였으나 공신이기에 용서하다.
형조에서 이성 절제사(泥城節制使) 김우(金宇)의 죄를 청하였다. “김우가 군사를 이끌고 남의 나라 땅에서 사냥하였고, 또 관중(官中)의 인삼을 가지고 중국의 물건과 무역하여 사용(私用)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 아비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여러 군(郡)에서 부의로 종이와 초[燭]를 구하였습니다. 이를 죄 주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니, 공신(功臣)인 때문이었다. 형조에서 또 청하였다.
“김효렴(金孝廉)이 자주(玆州)의 수령관을 지낼 때 관아 안의 노비를 소관 영사(令史) 순주(順州) 사람 김여해(金呂海)의 집에다 주어 누에를 기르게 하였고, 또 김여해를 백호(百戶)로 정하였으니, 그 간특하고 탐오하여 청렴하지 못함이 심하였습니다.”
순금사에 내려 법률에 의해 과죄(科罪)하라고 명하였다.
18)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2월 28일 신묘 2번째 기사 / 이원ㆍ이화영ㆍ황희ㆍ성발도ㆍ조용ㆍ박자청ㆍ정역ㆍ심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원(李原)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화영(李和英)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황희(黃喜)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성발도(成發道)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용(趙庸)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박자청(朴子靑)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정역(鄭易)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심온(沈溫)을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로, 김우(金宇)를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로 삼고, 검교 의정부 참찬(檢校議政府參贊) 하나를 더 설치하였다.
19)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0월 12일 경오 1번째 기사 / 명 황제가 남경에 돌아왔으므로 문안사 희천군 김우를 경사에 보내다.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를 보내어 경사(京師)에 갔으니, 황제가 남경(南京)에서 환가(還駕)하였으므로 기거(起居)를 흠문(欽問)하고자 함이었다. 석등잔(石燈盞) 큰 것과 작은 것 아울러 10개를 부쳐 보내어 진헌(進獻)하였다. ※ 석등잔(石燈盞) : 돌로 만든 등잔(燈盞). 옥등(玉燈).
20)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5월 6일 신묘 1번째 기사 / 경사에 가서 밀무역 등으로 명예를 실추시킨 원민생ㆍ장유신 등을 의금부에 가두다.
원민생(元閔生)·장유신(張有信)·김타(金沱)·김언용(金彦容)·오의(吳義)·강상부(姜尙傅)를 의금부에 가두었다. 의정부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원육전(元六典)》호전(戶典)내에, ‘부경 사신(赴京使臣)의 행차(行次)에 모리(謀利)하는 사람이 중국으로 나아가 몰래 매매를 행하여〈국가에〉오욕(汚辱)의 이름을 가져오게 하면 관계가 적지 아니하니, 진헌 방물(進獻方物), 노차 반전(路次盤纏), 의복(衣服) 이외의 잡물(雜物)은 모조리 몰관(沒官)하고, 그 모리(謀利)하는 사람이 끌고 가던 마필(馬匹)도 아울러 각참(各站)에 소속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정조 진표사(正朝進表使) 이도분(李都芬)과 진전사(進箋使) 이발(李潑) 등은 많은 사물(私物)을 가지고 가서 매매를 자행하여 중국에서 웃음거리가 되게 함으로써 상명(上命)을 욕되이 하였으니 일이 대체(大體)에 관계됩니다. 헌부(憲府)에서 4월 25일 유사(宥赦) 전의 일이라 하여 그 죄를 묻지 말도록 하여, 신충(宸衷)302) 에서 결단하시어 단지 직임만 정지케 하였으나, 이도분·이발·장유신·김언용 등을 유사(攸司)에 두어 그 이유를 국문(鞫問)함으로써 국법[邦憲]을 바르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의금부에 명하여, 이도분ㆍ이발 이외는 모두 가두어 국문하고, 근수(根隨) 매매인(買賣人)과 끌고 간 마필(馬匹)은《원육전(元六典)》에 의하여 참(站)에 속하게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국문(鞫問)할 때에 그 물주(物主)는 추핵(推劾)하지 말고 단지 그 매매한 필수(匹數)만 물어 모조리 속공(屬公)케 하라.”하니 조말생이 “신 등의 생각은 물주도 국문하여 모두를 징계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함이 옳다고 여겨집니다>”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이도분ㆍ이발 및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 등이 혹은 장삿군의 은정(銀丁)을 받기도 하고, 혹은 채단(綵段)도 받아들이고 이어서 그들을 데리고 중국(中國)으로 가게 되니, 전수(轉輸)하는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21)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5월 10일 을미 2번째 기사 / 흠문기거사ㆍ통사ㆍ압물 등의 처벌에 대해서도 지시하다.
사헌부에 명하여, 흠문 기거사(欽問起居使)ㆍ통사(通事)ㆍ압물(押物)ㆍ타각부(打角夫)ㆍ종인(從人) 등이 매매를 범람하게 한 사상(事狀)을 추핵(推覈)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김우(金宇) 등이 중국에 입조(入朝)하여 무역한 잡물은 모두 관에서 몰수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김우 이외의 서장관(書狀官)ㆍ통사(通事)ㆍ압물(押物) 등이 무역한 잡물은 반(半)을 관에서 몰수하고, 종인(從人)이 무역한 물건은 모조리 관에서 몰수하라.”
22)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윤5월 12일 정묘 3번째 기사 / 형조 판서 권진을 흠문기거사로 북경에 보내다.
형조 판서 권진(權軫)을 보내어 북경으로 떠나게 하니, 기거(起居)를 흠문(欽問)하기 위함이었다.처음에영의정 유정현(柳廷顯), 좌의정 박은(朴訔), 우의정 한상경(韓尙敬) 등이 중국 사신[天使] 황엄(黃儼)이 온다는 말을 듣고, 예궐(詣闕)하여 아뢰기를, “흠문사(欽問使)는 황엄이 아는 부마(駙馬)나 종친(宗親)ㆍ대신(大臣)을 보냄이 좋겠습니다. 권진(權軫)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조말생이 “예전에 한상경(韓尙敬)이 호조 판서가 되었을 때,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로 경사(京師)에 갔고,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도 또한 같았습니다. 이것은 본시 예(例)입니다.”하니, 한상경이 “신은 황제가 북정(北征)하였을 때 봉사(奉使)로 행재(行在)에 나아갔었고, 김우가 간 것은 황제가 남경(南京)으로 환행(還幸)한 뒤에 있었으니, 남경과 우리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 황제가 가까이 북경에 행행하였으니, 어찌 권진을 보내어 희기(喜氣)를 폄이 옳겠습니까?”하고, 박은이 “인정(人情)은 가까우면 꼭 친히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친조(親朝)하실 수 없다면 중신(重臣)으로 대신 가게 함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임금이 “경 등의 말은 크게 옳다. 진실로 청납(聽納)해야 마땅하나, 한상경과 김우도 또한 이러한 사신을 하였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종친이나 부마ㆍ대신을 보내어 예를 세움[立例]은 옳지 못한 것이다. 또 황엄이 아는 종친이란 한두 사람이 있을 뿐이니, 비록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내더라도 해될 것은 없다.”하니, 유정현 등이 말하였다.
“상교(上敎)가 옳습니다. 어찌 황엄이 알고 모르는데 구애되겠습니까? 또 타국(他國)의 대신(大臣)을 황엄이 다 알 수 있겠습니까?”
23)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11월 22일 계유 1번째 기사 / 전 부정 강호의 죄를 논하다.
전 부정(副正) 강호(姜湖)를 형조(刑曹)에 내리어 죄를 논하였다.
강호가 일찍이 김우(金宇)의 반인(伴人)으로서중국경사(京師)에 갔을 때, 많이 포물(布物)을 가지고 가서 지나치게 흥리(興利)를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관가에 몰수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물건을 도로 받고자 하여 북을 쳐서 신소(申訴)한 때문이었다. 강호는 본래 장사하는 사람이었다.
24)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2월 19일 경자 2번째 기사 / 희천군 김우의 졸기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가 졸(卒)하였다.김우는 희천(熙川)의 토호(土豪)요, 강계 만호(江界萬戶) 김영비(金英庇)의 아들이었다. 옛 이름은 김도길(金都吉)인데, 무재(武才)가 있었으나 글자를 알지 못하였고,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시종(侍從)의 노고가 있었고, 임금이 즉위하게 되자 좌명공신(佐命功臣)의 열(列)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양정(襄靖)이라 시호를 주었다.
25) 세종실록 33권, 세종 8년 8월 2일 계해 6번째 기사 / 예조 참판 이명덕이 증회받은 사실과 서반의 관작 임명의 과람함을 논의하다.
대사헌 권도(權蹈)가 계하기를, “예조 참판 이명덕(李明德)이 일찍이 병조 참판으로 있을 때에, 김효지(金孝知)의 산호영(珊瑚纓)의 증회(贈賄)를 받은 사실이 있어, 본부(本府)에서 이를 탄핵하온바, 이명덕이 답하기를, ‘내가 좋은 말[馬]로 그 값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효지는 이미 죽었고, 그 아우 김유지(金有知)는 말하기를, ‘부친 김우(金宇)가 생존해 있을 때에, 명덕이 부친으로부터 자류(紫騮)의 큰 말을 받은 바 있는데, 명덕이 좋은 말을 주었다는 것은 곧 이 자류마(紫騮馬)의 값인 것이다. 산호의 값은 어찌 좋은 말뿐이겠는가.’하니 그 본정(本情)을 살피건대 명덕이 그 증회를 받았음이 명백합니다. 또 서반(西班)의 관작이 많이 명덕의 손에서 나왔는데, 8품의 갑사(甲士)가 번(番)에서 내려갈 때에는 7품을 받고 7품은 6품을 받아,3, 4년 사이에 4, 5품에 이르렀고, 심지어는 직임 없는 사람이 집에 물러가 앉아 있는데도 그의 현부(賢否)를 묻지 않고 멀리서 그 관직을 임명하였으니,관작의 과람(過濫)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성대(聖代)에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그 재물을 탐하고 관직을 더럽힌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호(珊瑚)를 받은 사실은 사명(赦命)이 반포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니 논하지 않는 것이 옳고, 멀리 있는 자에게 그 관직을 준 데에 이르러서는 묻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26)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0월 20일 무술 4번째 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황상 등에게 더욱 엄한 벌을 내리라고 상소하다.
대사헌 조계생(趙啓生) 등이 상소하기를, “황상은 젊어서부터 아첨하느라고 듣기 좋게 꾸미는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낯빛[巧言令色]으로 사람들에게 좋게 보여 왔고, 교만하고 음탕한 행동을 방자히 행하여 유협(遊俠)의 명칭을 얻었으며, 전에 김우(金宇)와 더불어 첩을 서로 다투어서 더러운 소문이 중외에 자자하게 들리어 식자(識者)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사온데, 외람하게도 권고(眷顧)를 받아 정부ㆍ육조에 초탁(超擢) 천전하여 중론(衆論)을 놀라게 하였으니, 마땅히 개심(改心)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여 마음과 생각을 세척하고 명예와 절조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제 모상(母喪)을 당하여 바야흐로 최질(衰絰)의 복중에 있으면서 슬픈 것을 잊고 여색에 빠져 비밀히 창기(娼妓)를 불러 남몰래 빈소(殯所) 곁에서 간음(奸淫)한 바 있고, 총묘(塚墓)의 흙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두 번이나 창기의 집에 가서 음행을 마음껏 행하였으되 기탄 없었으니, 그 행동은 마치 금수와도 같은 것이어서 이미 사람이 아니온데, 또 질투심을 발로하여 밤중에 기생집에 이르러서 머리를 자르고 옷을 벗기고는 몸소 때려서 상처를 내게 했으니, 그 대륜(大倫)을 어지럽히고 강상(綱常)을 무너뜨림이 이보다 심한 것은 일찍이 있지 않았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충신(忠臣)은 효자의 가문에서 난다.’ 하였사온데, 오늘의 소행으로 본다면 황상이 평일에 성상께 향한 마음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이순몽(李順蒙)은 천성이 광혹(狂惑)하고, 또 재능과 행실이 없는데도 다만 공신의 맏아들이라 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나, 일찍이 근신함이 없었고, 여색을 탐하여 감순(監巡)하는 날은 임의로 직소(直所)를 떠나 평복[微服]차림으로〈사람들의 주목을 피하여〉 도보로 가서 황상의 첩을 도둑질하여 간통하다가 드디어 머리를 깎이고 옷을 벗기게 되는 등 그 몸을 욕되게 하였으니, 그 마음과 행실을 논하면 시정(市井)의 무리보다 심하오며, 더군다나 황상은 충의(忠義)를 같이 맹서하여 그 친의(親誼)가 형제와도 같은 사이에 감히 짐승의 마음을 품고 차마 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으니, 어찌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또 일이 발각된 뒤에도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조정에 낯을 들고 나왔고, 또 기생을 빼앗아 그의 사저(私邸)에 데려다 두었으니, 그 파렴치한 마음도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다만 황상을 장형에 처하고, 순몽을 외방으로 내쫓는 것으로 그친다면 밝으신 조정의 악한 자를 징계하고 풍속을 가다듬는 의의가 아닌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바라옵건대 명을 내리시와 황상을 밖으로 내쫓고, 순몽의 직첩을 거두시고, 이로써 황음(荒淫)한 무리를 징계하고 강상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상소한 말 가운데 불경(不敬)한 말이 있다 하여, 조계생과 집의(執義) 안숭선(安崇善)ㆍ장령(掌令) 송포(宋褒)ㆍ조서강(趙瑞康)ㆍ지평(持平) 김경(金俓)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소(疏) 가운데 말한바, 김우와 다툰 첩이란 바로 창기(娼妓) 가이(加伊)이니, 그는 뒤에 태종이 노래를 잘한다 하여 궁중에 들이어 총애한 바 있고 드디어 옹주(翁主)로 봉하였는데, 그것을 말하여 ‘더러운 이름이 중외에 자자하게 들리어 식자들이 수치스럽게 여겼다.’하여 신하로서 휘피(諱避)해야 할 의리에 어김이 있다 하여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27)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0월 22일 경자 2번째기사 / 조계생ㆍ안숭선ㆍ 송포ㆍ형조 판서 권진(權軫)을 보내어 북경으로 떠나게 하니, 기거(起居)를 흠문(欽問)하기 위함이었다.
의금부에서 조계생(趙啓生)ㆍ안숭선(安崇善)ㆍ송포(宋褒)ㆍ조서강(趙瑞康)ㆍ김경(金俓)의 죄안을 갖추어 여쭈니, 명하여 좌의정 황희(黃喜)ㆍ우의정 맹사 성(孟思誠)ㆍ예조 판서 신상(申商)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이제 헌부에서 황상과 이순몽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한 것은 그럴듯하나, 그러나 그 상소 내용에는사유(赦宥) 전의 일을 언급하였고,또한 태종 때의
일도 감히 거론(擧論)하였다. 홍(洪)씨가 궁중으로 들어와 선왕을 모신지라, 봉하여 옹주(翁主)를 삼았는데,만약에 선왕이 생존해계신다면 어찌 이런 소리를 감히 아울러서 발론할 것인가. 내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노라. 헌부의 말은 황상의 일 때문에 발언한 것이나, 안숭선이 처음에 황상의 범한 일들을 발언해 놓고, 바로 또 말하기를, ‘황상과 김우(金宇)가 첩을 다툰 사건이 바 로 임금을 간범(干犯)한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가. 하니, 조계생이 말하기를, ‘비록 임금을 간범하였다 하더라도 홍씨를 배척해서 말하지 않았으니,무슨 관계가 있겠는가’하므로 이에 전체의 대관이 말을 합하여 죄를 청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는가?”하니, 황희ㆍ맹사성 등이 대답하기를, “황상의 일로 인하여 이 말을 발론한 것은 잠시 살핌을 잃은 것입니다. 경하게 하려면 파직(罷職)에 처하시고, 중하게 하려면 부처(付處)에 처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하고, 신상은 말하기를, “만약 헌부에서 당초에 모르고 발언하였다면 모르거니와, ‘임금에 간범하는 일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는가.’고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홍씨를 배척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해롭겠는가?’하였다면, 이는 임금께 간범됨을 알고도 감히 말한 것이니, 그 불경함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으니, 내가 절충해서 처리하겠노라.”
하고, 좌대언(左代言) 김자(金赭)에게 명하기를, “이 사건은 그 말이 선왕과 관계되니, 내가 독단하여 용서할 일이 아니다. 대저 한 관아의 일이란 반드시 행수(行首)와 장무(掌務)가 이를 알아서 하는 바이며, 더욱이 이글은 장무 조서강이 붓을 잡고, 대사헌이 승낙하여 이룬 것으로서 죄는 행수와 장무에게 있으니, 모두 외방에 부처(付處)하는 것이 옳다.”하고, 드디어 계생은 직산(稷山)으로 서강은 강음(江陰)으로 각기 부처하게 하고, 안숭선과 송포와 김경은 관직을 파면하였다.
▣ 중종ㆍ명종실록
(통정대부 우부승지 위주군 휘 백순, 通政大夫 右副承旨 威州君 諱 伯醇)
1)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0월 27일 기축 3번째 기사 / 간원에서 선비들의 엽관 운동에 대해 고하다.
대간이 이사종과 이장길의 일을 아뢰고 간원이 김숙보의 일을 아뢰었다. 그러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일 ‘감찰 본방(監察本房)에 기율(紀律)이 없다.’하므로, 문신을 택차(擇差)할 때에 이미 아뢰었습니다.새로 제수된 감찰 박광좌(朴光佐)는 자문(咨文) 때문에 점마(點馬)하러 평안도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안세언(安世 彦)은 본디 병이 있는 사람이니 체직시키소서.”【안세언만을 지칭해서 말한 것이다.】하고, 간원이 또 아뢰기를, “근래 선비의 습속이 비하(卑下)하여 엽관 운동으로 진출하는 것이 풍습이 되어 뜻있는 선비들이 한창 과거 공부 중에 있으면서도 먼저 다리를 놓아 벼슬할 생각들을 갖고 있는데, 이는 조행(操行)에 염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학자들이 걸맞지 않는 자급(資級)을 외람되이 얻으면 사림(士林)이 크게 꾸짖었고 남행직(南行職)이라도 제수되면 실행(失行)한 처녀같이 비루하게 여겼고, 뒷날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청현직(淸顯職)에서는 배척받아 용납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모두 자중하는 지조가 있고, 다른 길로 출신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선비의 습속이 발라지고 학술을 닦은 선비들이 빈빈(彬彬)하게 배출되었습니다. 요사이 듣건대 심지어는 학궁(學宮)에서 제수되기로 지목된 자가 있으면 뻔뻔스레 서로 축하하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하니, 선비들의 습속이 비루하게 되기가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예문관(藝文館)은 바로 사림 중에서 엄격히 선발해서 임명하여야 하는 곳으 로 가려서 추천할 때에는 매우 신중히 해야 합니다. 검열(檢閱) 최경홍(崔景弘)은 일찍이 참봉을 지냈는데, 지금 중요한 자리에 들어오니, 사림을 격려시키는 뜻이 없습니다. 체직시키소서. 또 검열 김백순(金伯醇) 역시 일찍이 참봉이었던 자입니다. 아울러 체직시켜 선비의 습속을 진작시키기에 힘쓰소서.”하니, 사헌부에 답하기를, “감찰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고, 사간원에 답하였다.
“근래 선비의 습속에 비하된 것은 과연 격려(激勵)시켜야겠다. 사관(史官)은 붓을 잡고서 만세의 공론을 지탱하는 곳이니, 가려서 차임해야 한다는 말은 지당하다. 그러나 김백순은 사관이 된 지 오랬다. 김백순과 최경홍의 인물됨이 부당한 지경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체직시킬 것은 없다.”
2)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0월 28일 경인 1번째 기사 / 헌부에서 검열 김백순ㆍ최경홍의 이른 승진을 들어 체직을 건의하다.
대간이 이사종과 이장길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검열 김백순과 최경홍의 일은 어제 사중(司中)에서도 의논이 있었습니다. 근래 선비들의 습속이 날로 그릇되어 배우는 자들이 모두 벼슬길에 나가는 데만 정신을 쏟고 염치는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선비들의 습속이 아름답지 못한 것이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습니다. 속히 체직시켜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 잡으서.” 하고, 간원은 김숙보ㆍ김백순ㆍ최경홍의 일을 아뢰었다. 그러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3)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0월 29일 신묘 1번째 기사 / 대간에서 올린 김숙보ㆍ최경홍ㆍ김백순의 체직건을 허락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간이 이사종ㆍ이장길ㆍ김숙보ㆍ김백순ㆍ최경홍ㆍ이종익 등의 일을 아뢰었다. 김숙보ㆍ최경홍ㆍ김백순은 체직시키라 하고,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았다.
4)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1월 1일 계사 1번째 기사 / 홍언필ㆍ윤탁으로하여금 《대학》을 토론케 하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유생(儒生)들을 강(講)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생의 강(講)이 끝나면 좌우에서《대학(大學)》1부를 가지고 논란(論難)하도록 하라.”하매, 심정(沈貞)이 아뢰기를, “홍언필(洪彦弼)과 윤탁(尹倬)으로 하여금 좌석에 나와 논란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
이행(李荇)이 윤탁에게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아름다운 문왕(文王)께서는 아! 끊임없이 공경하셨네.’에서, 문왕이 지극한 선[至善]에 머물렀다는 뜻을 자세히 아뢰시오.”
하니, 윤탁이 아뢰기를, “《대학》에서 문왕의 사적을 이같이 말한 것은 지극한 선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문왕이 왕계(王季)를 하루에 세 번씩 뵈었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문왕이 효에 머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하를 3분하여 그 오분이 상(商)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들을 거느리고 주(紂)를 섬긴 것은 남의 신하가 되어 경(敬)에 머문 것임을 역시 알 수 있습니다. 문왕의 정치의 근본은 덕을 밝히는 데 있었으므로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교화가 양양하게 천하에 넘쳐 사람들은 모두 악행을 선행으로 바꾸었으며,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의 임금들이 잘잘못을 질정(質正)하러 그 경내에 들어가니, 농사짓는 사람들은 밭두둑을 서로 양보하고 그 수도에 들어가니, 대부(大夫)와 사(士)가 서로 양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 임금은 이에 전토를 다투지 않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 사이의 비루하던 습속은 변화하여, 남녀의 도리가 발라지고 혼인의 시기를 놓치지 않으며 규문(閨門)의 교화가 사방으로 퍼지니, 문왕이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한 공적이 지선(至善)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문왕의 인품이 밝고 공경스러운 데서 비롯된 것으로 ‘좋은 명성이 끊이지 않는다.’ 느니, ‘아. 밝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왕의 덕의 순수함이여, 그 순수함 또한 그치지 않는도다.’ 한 말들은 모두가 그 인품이 밝고 공경스러운 소치입니다.”하였다. 이행이 말하기를, “혈구의 도[絜矩之道]가 어찌 홀로 임금만이 하는 것이겠는가? 신하된 사람도 반드시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소?”하니, 언필이 아뢰기를, “윤탁은 이학(理學)에 정통하지만 신은 본디 이학을 모릅니다.
《대학》의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은 모두 덕을 밝히고 백성을 친하게 하는 일인데, 소위 혈구라 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 천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마치 구(矩)로 사물을 헤아리는[絜] 것과 같습니다. 또 진서산(眞西山)의《대학연의(大學衍義)》에는 역대 제왕의 일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 귀감(龜鑑)이 되니, 마땅히 진강(進講)해야 할 책입니다.
구준(丘濬)의《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의논이 순정(純正)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진강한 지는 오랩니다. 권질(卷帙)이 매우 많으므로 쉽게 진강(進講)을 마칠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은 혼자 열람하시기에는 마땅하나 진강하기에는 부적합하니,《대학연의》를 가지고 진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심정이 아뢰기를, “언필의 말은 바로 홍문관의 뜻입니다.《연의보》는 의논이 광대하고 문장이 자세합니다만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가 본다면, 취하는 말이 반드시 많지 많을 것입니다. 전일 정광필(鄭光弼)이 경연(經筵)에서 이 책으로 바꾸어 진강하자고 하였는데 ‘옛일의 연원을 널리 알 수 있으므로 군신(群臣)을 접대할 때에 이 책으로 강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홍문관은 이 책은 지리(支離)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게는 천하를 다스리는 법도와 작게는 세세한 일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는 폐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행은 아뢰기를, “《대학연의보》는 석강(夕講)에 하면 안되고 조강에 해야 합니다. 석강 때에는 장수(張數)를 배로 하여 한 번 죽 훑어보는 식으로 진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진강을 시작했으니 중간에 폐지할 수 없다. 마땅히 장수를 배로 해서 한 번 죽 진강하여야 한다.”하였다. 이행이 아뢰기를, “전에는 남행(南行)인 자가 청현직(淸顯職)에 오르는 것도 무방했으며 삼공(三公)이나 대간에 오른 자도 많았었습니다. 이번에 대간이 아뢴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곧은 것을 들어 쓴다는 것이나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매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하고, 심정은 아뢰기를, “과거는 인재를 가려 쓰는 방법입니다. 옛날에는 도덕(道德)이 있거나 공명(功名)이 있거나 절의(節義)가 있거나 한 선비들이 있었는데,삼대(三代) 이후로는 도덕 있는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과거를 통해 출신한 사람들은 모두가 사장(詞章)이나 기송(記誦)하는 자들이니 어찌 귀중한 것이 있겠습니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지만, 재주가 있으면서 등용되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 조종조에서는 남행을 따지지 않고 등용하여 큰 직임을 맡은 이도 많았으니, 신분을 구별해서는 안됩니다. 공자 같은 성인도 일찍이 위리(委吏)도 지냈고 승전(乘田) 노릇도 했습니다.
공자의 문제자(門弟子)로 계씨(季氏)의 집에 벼슬살이한 사람도 있었으니, 이를 통틀어 일률적으로 논하는 것은 더욱 부당합니다. 근자의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은 모두 심학(心學)을 주로 한 사람들인데, 여창은 전에 참봉이 되었다가 과거에 급제한 뒤 역시 한림(翰林)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만 따른다면 인재 등용하는 길에 어찌 방해됨이 없겠습니까?”【검열(檢閱) 김백순(金伯醇)과 최경홍(崔景弘)은 출신 전에 참봉을 지냈기 때문에 대간이 논박하여 개정했다.】하고, 이행은 아뢰기를,
“이는 모두 부형들의 잘못입니다. 부모된 자들이 나이 어린 자제들을 학문에 힘쓰도록 하지는 않고, 청탁으로 남행이 되게 합니다. 때문에 연소한 사람으로서 출사하기를 꾀하는 자들이 많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한림(翰林) 등의 직임이 안된다는 말이지 인물을 가지고 논계한 것이 아니다.남행이라고 하여 매양 청현직에 오를 수 없다면 과연 방해가 된다. 이는 연소한 사람들이 과거(科擧)의 업(業)은 닦지 않고 남행을 구함으로써 한때의 사습(士習)이 점차 비루하게 되기 때문에 시폐(時弊)를 고치기 위하여 아뢴 것이다.”하였다. 심정이 아뢰기를, “한창려(韓昌黎)는 세 번 편지를 올려 등용되기를 구했으므로 후세의 기롱(譏弄)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곧 도(道)를 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후인들도 시비를 하지 못합니다. 지금 참봉이었기 때문에 청요직에 오르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면, 어찌 방해됨이 없겠습니까? 인재를 쓰는 데에 있어서는 치우쳐서는 안됩니다.”하고 언필은 아뢰기를,
“ ‘초야에 묻힌 훌륭한 선비를 들어 쓰지 못할 바엔 재상의 자제를 천거해 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재상의 자제는 가정의 교육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듣고 본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문자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인물이 쓸만하면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일렀다.
“이것을 예로 삼는다면 인재를 등용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니, 그렇게 할 수없다.”
5)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1월 2일 갑오 3번째 기사 / 김백순ㆍ최경홍의 체직건이 잘못되었음을 대간에 알리다.
대간에 전교하였다.
“대신들이 ‘지난번 대간이 한림 김백순(金伯醇)과최경홍(崔景弘) 등이 일찍이 남행(南行)이었다고 해서 논계하여 체직시켰다. 이는 그 당시 미처 서경(署經)이 안되었기 때문에 체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림이 되었고 종사(從仕)한 지도 오래된 자를 같은 예로 체직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으니, 대신들의 말이 옳다. 경홍과 백순은 종사한 지 오래되었으니 본관(本館)에서 반드시 다시 천거할 것이다. 대신들은 대간이 아뢴 것이 인재를 쓰는 방도에 해로운 것이라 했는데, 과연 이것을 예로 삼으면 뒷날의 폐단이 될 것이다. 이러한 뜻을 알라!”
6)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1월 3일 을미 2번째 기사 / 대사간 원계채ㆍ집의 오준이 김백순ㆍ최경홍의 일로 사직을 청하다.
대사간 원계채(元繼蔡)와 집의 오준(吳準) 등이 아뢰기를, “어제 전교(傳敎)를 보건대, 전일 최경홍과 김백순 등의 일을 양사(兩司)가 논계(論啓)한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대개 옛날에는 유자(儒者)들이 여러번 과거를 보아 떨어졌거나 오랫동안 급제하지 못하여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조정에서 그 인물을 아깝게 여겨 공론에 따라 천거해 썼습니다. 재주와 지혜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구구하게 쓰이기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모두 다 당세에 등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행으로 경상(卿相)에까지 오른 이도 간혹 있었고, 출신(出身)한 뒤에는 대간이나 시종이 되는 것도 무방합니다. 지금은 인심이 예스럽지 않아 선비의 습속이 날로 비루해져 학업을 닦는 자들이 나이가 겨우 20세가 되어 이제 한창 과거 공부 중에 있으면서도 벼슬을 구하기에 분주합니다. 그러므로 사중(司中)에서는 이에 대한 의논을 아뢰어 한때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고 한 것뿐입니다. 반드시 위에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밝게 보이신 뒤에야 학자들 역시 자중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들이 아뢴 뜻입니다. 대신들이 대간이 아뢴 것에 대해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했으니, 신들이 직에 있기가 온편치 못하여 감히 사직(辭職)합니다.”하니. 전교하였다.
“경홍과 백순의 일을 대간이 아뢰었기 때문에 일일이 구별할 수가 없어 모두 체직시키도록 했던 것인데, 이는 내가 일을 잘못 처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대신들이 나의 잘못을 논한 것이지 대간이 아뢴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사직하지 말라!”
7) 중종실록 66권, 중종 24년 11월 3일 을미 4번째 기사 / 대사간 원계채 등이 최경홍ㆍ김백순의 일을 논하다
대사간 원계채(元繼蔡) 등이 다시 아뢰기를, “최경홍과 김백순의 일은 남행(南行)은 청현직(淸顯職)에 등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래 선비의 습속이 비루해져서 이욕(利慾)으로만 내닫기에 급급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한 때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함께 의논해서 아뢰었던 것입니다. 무조건 남행은 청현직에 오를 수 없다고 한다면 반드시 인재를 등용하는 방도에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대신이 ‘상께서 너그럽게 용납하라!’는 말은 대간의 말을 빨리 들으라고 지적한 것이니,대신의 말도 언로에 폐단이 있습니다. 상께서는 성찰하셔야 할 일입니다. 대개 한때의 폐단을 구하려는 것이 어찌 대간만의 근심이겠습니까?”하니, 전교하였다.
“경홍 등의 일은 당초 대간이 뒷날의 폐단 때문에 논계한 것이다. 그러나 뒷날에 무슨 폐단이 있겠는가?”
8) 중종실록 67권, 중종 25년 1월 2일 계사 1번째 기사 / 대간ㆍ헌부ㆍ간원에서 진언하니, 왕자군 등을 추고하게 하다.
대간(臺諫)이 이함(李菡)과 박조(朴稠)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憲府)는 왕자군(王子君)과 조충손(趙忠孫) 등의 일을 아뢰고, 간원(諫院)은 김백순(金伯醇)과 전조(銓曹)를 추고(推考)하자고 아뢰니, 전교(傳敎)하였다. “왕자군 등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추고하라!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9) 중종실록 67권, 중종 25년 1월 10일 신축 2번째 기사 / 대간이 이함의 일을 헌부가 한경훈과 전 승지의 일을 아뢰다.
대간이 이함(李菡)의 일을 아뢰고, 헌부가 한경훈(韓慶勳)과 전(前) 승지(承旨)에 대한 일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 김광철(金光轍)은 전에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으로 있을 때 관아의 노비들에게 함부로 형벌을 가하여 죽게 했는데도 사면을 받았으니, 죄를 면제받고서용(敍用)한 것만도 이미 과분한데, 준품(準品)에 서용한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체직시키소서.” 하고 간원은 김백순(金伯醇)의 일을 아뢰었다. 그러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0) 중종실록 67권, 중종 25년 2월 19일 기묘 4번째 기사 / 헌부가 이귀령과 김윤침을 체직시킬 것을 건의하다.
헌부가 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대사성(大司成)은 반드시 학문이 해박한 사람을 가려서 교육의 책임을 맡겨야 합니다. 이귀령(李龜齡)은 경술(經術)이 부족하여 이 책임에는 합당하지 않으니 체직시키소서.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 김윤침(金允琛)은 문벌이 비천하고 인물이 용렬하고 패악스럽습니다. 그리고 평사의 직책은 한갓 서기(書記)의 임무만을 맡는 것이 아니며 근래에는 변사(邊事)가 있어서 부득이 가려서 차임하는 일이고 보면 이 사람은 합당치 않으니 체직시키소서.”하고, 간원은 아뢰기를,
“부상 대고(富商大賈)들이 섬에 들어가 몰래 왜인(倭人)의 물건을 사온 일이 발각되어 경상도 관찰사 최세절(崔世節)이 지금 한창 수금(囚禁)하고 추문하는 중이며 그 당(黨)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을 불의(不意)에 나가 엄습하여 잡아다가 수금할 일로 형조에 공문을 보냈으나 잡아서 수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저 부상 대고가 남방(南方)으로 오고 가면서 왜인과 교통하며 몰래 물건을 무역하는 일은 지금의 큰 걱정거리입니다. 형조에게 정확하게 조처하여 수금하게 하시고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하유하시어 엄히 궁추(窮推)하여 크게 국법(國法)을 보여서 후인(後人)들을 징계케 하소서. 그리고 형조 정랑(刑曹正郞) 신거이(愼居易)는 언어가 경망하고 행사(行事)가 어긋나서 모든 송사의 판결에 잘못된 일이 많이 있으니, 형관(刑官)으로는 합당치 않습니다. 체직시키소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김백순(金伯醇)은 세 번이나 서경(署經)을 넘겼고 본직(本職)에 제수된 지가 이미 50일이 넘었습니다. 사관(史官)은 중대한 자리라서 오래도록 비워둘 수 없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11)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 10월 19일 을해 1번째 기사 / 형조 정랑 정원을 체직시키고 판서 박호 등을 추고하라는 대간헌부의 논의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형조 정랑 정원(鄭源)은 본디 물의가 있으므로 육조(六曹)의 낭관에 맞지 않으니, 체직시키소서.”하고, 간원은 또 아뢰기를, “봉상시(奉常寺)의 노자(奴子) 4인【세존(世存)ㆍ현년(玄年)ㆍ석근(石斤)ㆍ종석(從石)임.】 등이 제물(祭物)을 고대(庫臺)에 넣어 간수할 때에 몰래 구멍을 뚫고 쌀과 밀가루를 훔쳐 내는 것을 참봉(參奉) 김백순(金伯醇)이 숙직한 날에 현장에서 체포하여 곧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적(趙績)에게 고하였으나, 조적이 사사로이 노자를 감싸고 도리어 사고(私庫)의 물건을 출납할 때에 훔쳐 가진 것으로 형조에 신보(申報)하여, 다만 장 육십(杖六十)을 수속(收贖)하였습니다. 대저 제물을 훔쳐간 것은 그 죄가 아주 무거운데, 조적은 사사로이 하인을 감싸려는 생각으로 하관(下官)이 신고한 말을 무시하고 사정(私情)을 써서 가볍게 신보하였으니, 아주 해괴합니다. 조적을 파직시키소서. 또 형조의 관리들은, 봉상시가 사고의 물건을 훔쳐간 것으로 이보(移報)하였더라도, 그 노자가 훔쳐간 수량에 대하여 한가지로 귀착시켜 형추하여 실정을 알아 내어 철저히 다스렸어야 옳은데, 전혀 따져 묻지 않고 적간(摘奸)할 때에 현장에서 드러난 것으로만 논하였습니다. 가볍게 논하려 했더라도 거론할 말이 없을 경우엔 그 시(寺)의 서원(書員)을 잡아다가 허실을 물어서라도 증거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범한 사람은 전혀 추문하지 않고 도리어 악한 짓을 동조한 사람에게 물어서 증험으로 삼아, 장형(杖刑)으로만 조율(照律)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이 깊다고 거짓 꾸민 말을 받아들여서 장형을 속(贖)하게 하여, 법을 어겨 가면서 사람의 죄를 가감(加減)시켰으니, 사정을 쓴 것이 더욱 심합니다. 판서 박호(朴壕), 참판 최세절(崔世節), 참의 김선(金璇), 좌랑 이지분(李之蕡)은 다 추고하여 파직시키고, 노자 4인 등은 법사로 옮겨 추고하여 철저히 다스리소서. 대저 오늘을 지내면 발인(發靷)이 임박한데, 발인부터 졸곡까지는 잇달아 재계하고 제사지내는 일이 있으므로 일을 논하기 어려울 듯하니, 전에 아뢴 것을 망설이지 말고 쾌히 결단하소서.” 하니, 조적과 형조의 관리는 추고하라고 명하고 봉상시의 노자는 조옥(詔獄)에 내리라고 명하였으나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았다.
12) 중종실록 70권, 중종 26년 4월 6일 경신 2번째 기사 / 정언호를 추고하니, 언호가 억울함을 아뢰다.
삼공이 또 아뢰기를, “신들이 마침 왔다가 정언호(鄭彦浩)의 옥중(獄中) 상소(上疏)를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언호가 파직되어 집에 있기는 하나 시종(侍從)을 지낸 사람인데, 이항(李沆)을 방문했다고 하더라도 교유(敎誘)할 수야 있겠습니까? 사실을 조사해 보지 않는다면 스스로는 해명할 길이 없을까 우려스럽습니다.
가령 승복하더라도 위에서는 헤아려 조처해야 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언호의 추안(推案)과 상소【언호가 옥중에서 올린 소의 내용은 초사(招辭)의 내용과 같았는데 금부(禁府)에 계하(啓下)하였음】는 내가 상세히 살펴보았다. 언호가 비록 자기의 죄를 자복했더라도 이항과 같은 율(律)일 수야 있겠는가 내가 짐작하여 조처하겠다.”하였다.
정언호를 추고하라는 전지(傳旨)는, “이항이 공론에 죄를 얻었으므로 파직되어 고향에 가 있었는데, 분을 품고 올라왔으니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호는 같은 파직인(罷職人)으로서 먼저 찾아갔고 이항의 집에서 동시에 나왔으니, 종적(蹤迹)이 의심스럽다. 이상과 같은 사연으로 추고하도록 의금부에 하달하라!”하였는데, 언호가 공초하기를, “신이 지난 3월 27일 이른 아침에 동서(同壻)인 절도사(節度使) 윤임(尹任) 의 집에 갔었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윤정림(尹廷霖)도 와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사시(巳時)쯤 해서 윤임이 친가(親家)에 왔으므로 즉시 노자(奴子)를 시켜 이웃에 사는 신광수(神光守)가 집에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더니, 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방문(訪問)하고 얘기하다가 ‘이항이 상경했다는 게 사실인가?’고 물으니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조금 있다 동네에 사는 한근(韓瑾)과 성수종(成守悰) 들이 왔습니다. 그래서 신이 또 수종에게 ‘이항이 상경했다는 게 사실인가?’고 물으니 수종이 ‘오늘 자기의 죄를 변명(辨明)하기 위해 직접 상소를 올렸다.’고 했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왜 그렇게 분별없는 짓을 했는가?’ 했습니다. 수종은 먼저 나갔고, 정자(正字) 김백순(金伯醇)이 나를 찾아왔으므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다 인정(人定)이 지난 뒤 신은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항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위에 말한 사람들이 다같이 환히 알고 있습니다. 실지로 방문했다면 소(疏)를 쓴 신분(申濆)이 반드시 보고 알았을 것입니다.
신이 신광수(神光守)의 집에 도착한 시각은 사시(巳時)이고 이항이 대궐에 들어간 시각은 미시(未時)와 신시(申時)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시각의 차이가 이렇게 현격했으니 방문할 리가 만무합니다. 더구나 신광수의 집에 갔다 올때 마침 이조의 서리(書吏) 황옥곤(黃玉崐)과 그 이웃에 사는 충훈부(忠勳府) 노(奴) 명련(命連)을 만났었습니다. 만일 이항의 집에 갔었다면 위에 말한 사람들도 반드시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이항과 한마을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이나 지위의 격차가심해서 평소에도 친하지 않다는 것을 온 동리 사람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도 찾아가지 않았는데, 더구나 지금 조정에 죄를 얻은 터에 감히 찾아가겠습니까? 신은 이항이 상경(上京)한 것을 괴이하게 여겨 재차 사람에게 물어봤고, 또 상소한 것을 매우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먼저 방문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광수의 집이 항(沆)의 집과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신이 왕래할 적에 본 사람이 틀림없이 헛말을 지어내어 전파시킨 것 같습니다. 신이 못나기는 했어도 외람되이 천은(天恩)을 받아 일찍이 대간과 시종의 반열에 있은 지 이미 10여 년입니다. 죄를 범했다면 그것이 죽을 죄라고 하더라도 정리상 속일 수 없는 것이거든, 하물며 이런 정도의 죄가 아닌데 간교한 말을 꾸며 성명(聖明)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먼저 찾아간 것으로 의심을 살 만한 일은 전혀 한 적이 없었습니다.”하였다.
의금부가 상에게 아뢰고 형신하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13) 중종실록 71권, 중종 26년 7월 11일 임술 2번째 기사 / 부제학 권예 등이 차자를 올려 이조에서 인물의 전형에 사정을 씀을 아뢰다.
홍문관 부제학 권예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조(吏曹)는 인물을 전형(銓衡)하는 소임을 관장(管掌)하니, 백관(百官)에 빈자리가 있으면 그때마다 의망하여 제수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사관(四館)의 관원은 차례대로 승진시켜야 하고 침체시켜 오래 비워둔 채 파산(罷散)된 자가 다시 서임될 때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조(吏曹)가, 예문관에는 거중(居中)인김백순(金伯醇)을 서임(敍任)하려 하고, 승문원에는 파산된 서고(徐固)를 쓰려 하여 오랫동안 그 자리를 비워두고 구차스럽게 시일을 끌면서 차례에 해당하는 관원을 승진시키지 않고 법을 어기며 사정을 따르니, 여론이 소란합니다. 법사에서는 규찰하여 거론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불문에 붙여 두고 정욱(鄭郁)의 월차(越次) 승진만을 논하다가 삼공의 아룀을 듣고서는 또 서고는 마땅히 개정해야 한다고 하여 앞뒤가 다르니, 사체를 크게 잃었습니다. 미관(微官)의 진퇴가 경중에 관계되지 않을 것 같지만, 전조(銓曹)가 사정을 쓰는 조짐과 법관의 지론(持論)에 있어서의 대실수는 관계되는 바가 가벼운 것이 아니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였다.
“지금 차자를 보니 법관의 지론이 잘못되었음을 논하였는데 그 말이 지당하다. 체직하라.”
14) 중종실록 71권, 중종 26년 7월 28일 기묘 2번째 기사 / 간원에서 검열 김백순을 체직시키도록 청하니, 윤허하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간원이 또 아뢰기를, “검열(檢閱) 김백순(金伯醇)은 세 번이나 서경(署經) 기한을 넘겼으니 체직시키소서.”하니, 백순을 체직시키게 하고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았다.
15) 중종실록 79권, 중종 30년 2월 22일 계축 3번째 기사 / 의정부ㆍ병조가 의논하여 유장과 무장을 뽑고 의정부ㆍ이조ㆍ예조가 의논하여 사유를 뽑다.
정부와 병조가 함께 의논하여 유장(儒將)에 이사균(李思鈞)ㆍ김인손(金麟孫)ㆍ최세절(崔世節)과 무장(武將)에 조윤손(曺閏孫)ㆍ우맹선(禹孟善)ㆍ황침(黃琛)ㆍ장언량(張彦良)과 무신으로 배양할 사람에 김철수(金鐵壽)ㆍ김수연(金秀淵)ㆍ조윤무(曺允武)ㆍ지세방(池世芳)ㆍ이사증(李思曾)ㆍ조안국(趙安國)허연(許碾) 등을 뽑았다.
정부ㆍ이조ㆍ예조가 함께 의논하여 사유(師儒)에 적합한 사람으로 정사룡(鄭士龍)ㆍ이희보(李希輔)ㆍ이순(李純)ㆍ황효공(黃孝恭)ㆍ윤사익(尹思翼)ㆍ조세영(趙世英)ㆍ임계중(任繼重)ㆍ김미(金亹)ㆍ원혼(元混)ㆍ조사수(趙士秀)ㆍ홍덕연(洪德演)ㆍ김백순(金伯醇)ㆍ박세호(朴世豪) 등을 뽑았다.
16) 중종실록 92권, 중종 34년 10월 14일 무인 4번째 기사 / 신수경을 파직시키고 김백순의 승급을 개정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김백순(金伯醇)은 전에 수원 군수(水原郡守)로 있을 때 잘못한 일이 많았고, 또 체직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3품으로 승급시키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개정하소서.
장원(掌苑) 신수경은 오만하게 법사(法司)를 업신여겼으니 매우 해괴하고 경악스럽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우선 먼저 파직하소서.”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7) 중종실록 93권, 중종 35년 5월 15일 병오 2번째 기사 / 용산강 기우제의 제사지낼 장소에 대해 김백순이 아뢰다.
용산강(龍山江) 기우제의 헌관(獻官) 김백순(金伯醇)이 제사 지낼 장소에 이르러 대축(大祝)을 보내어 와서 아뢰기를,
“평상시 별제(別祭)하던 곳에는 모두 단선(壇墠)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단선이 없기 때문에 장막을 쳐야겠습니다. 오늘 향(香)을 받아 가지고 올 적에 전설사(典設司)에서 차일장(遮日帳)을 준비하기는 했습니다만, 어느 곳에다 설치해야 될지를 분명히 몰라서 늙은 노인 세 사람을 불러 을사년의 구례(舊例)를 문의했습니다. 그랬더니 ‘단지 그때 민영견(閔永肩)이 개울을 판 일만 보았을 뿐 제사지낸 것은 모르겠다.’고 하므로, 우선 강가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할지를 몰라서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지금 용산강에다 제사를 지내려 하는 것은 을사년의 구례를 모방한 것이다. 성종조(成宗朝)의 제문(祭文)을 살펴보면 제사 지내는 것이 온당치 못한 것 같다. 근래에 하지 않던 일에 대해서는, 예조가 어느 곳에서 제사 지냈는지와 근래 제사 지내지 않은 내용을 상세히 조사하여 계품(啓稟)해야 되는데 계품하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 이미 향을 받아 가지고 갔으니 제사 지내지 않고 돌아올 수는 없다. 마땅히 정결한 곳을 가려 용신(龍神)에게 제사 지내라. 예조에는 미처 자세히살피지못했다는 말을 전하여 잘못되었음을 알게 하라.”
18)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3일 경신 1번째 기사 / 달자들의 변에 대비하고 있다는 의주 목사 김백순의 서장
정원(政院)이 의주 목사 【김백순(金伯醇).】의 서장(書狀)을 입계하였다.
【*서장은 다음과 같다. “사은사(謝恩使) 심광언(沈光彦)ㆍ황염(黃恬) 행차(行次)의 선래통사(先來通事) 신장령(申長齡) 등이 이달 19일에 의주에 도착하여 하는 말이 ‘달자(㺚子)들의 기병(騎兵) 5천여 명이 비산(比山)ㆍ하영(下營) 등지에서 오늘 내일쯤 소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했으므로 가까운 길에 있는 총병관(總兵官)들이 모두 둔병하고 기다리고 있다.’ 하였고, 또 당인(唐人)
이 적도(赤島)에 피신 와서 하는 말이 ‘달자들이 지난해에 방비의 허실을 알아보려고 겸장보(鎌場堡)에 잠입했었는데 수보(守堡)가 3천여 명을 유인하여 술을 권해 극도로 취해 있을 때 모두 베어 죽였는데, 이 때문에 달자들이 분심을 품고서 7천여 기병이 둔치고 있으며 원수를 갚으려고 획책하고 있으므로 지금도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기에, 바야흐로 군마를 정비하여 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19) 명종실록 2권, 명종 즉위년 10월 21일 경술 1번째 기사 / 표류인을 거느리고 온 중국 사람에게 인계 인수하는 문서를 줄 것을 명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의주 목사(義州牧師) 김백순(金伯醇)의 장계에 본국의 표류인을 거느리고 온 중국 사람이 교할(交割)하는 문서를 받아가려 한다고 하니, 승문원을 시켜 의주 목사의 답장을 만들어 중국 사람에게 부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20) 명종실록 2권, 명종 즉위년 11월 13일 임신 1번째 기사 / 이기가 중국 사신에 대한 접반 책임자의 의정을 청하다.
의주 목사(義州牧使) 김백순(金伯醇)의 서장을 입계하니,【고부 청시사(告訃請諡使)의 선래 통사(先來通事) 고언명(高彦明) 등이 와서 ‘대행왕(大行王)의 시호는 영정(榮靖)이며, 사제 정사(賜祭正使)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유원(劉遠)과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소일악(簫一鶚)이 11월 15일 경에 출발할 것이고, 봉왕 정사(封王正使) 내궁감 태감(內宮監太監) 섭보(聶寶)와 부사 태감 곽난(郭鑾)이 같은 달 24일 경에 출발할 것이다.’하였다.】 원상(院相) 이기(李芑)에게 전교하기를, “중국 사신이 빨리 올지 늦게 올지 알 수 없다. 만약 빨리 온다면 모든 일을 조치하여 잘못되거나 빠짐이 없도록 하라!”하니, 이기가 회계하기를, “산대(山臺) 등 모든 일을 빨리해야 하겠습니까?또 접반(接伴)하는 책임자를 오늘 중으로 의정해야 하니, 대신을 불러 함께 의논하소서.”하였다.
21) 명종실록 2권, 명종 즉위년 12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 / 의주 목사 김백순이 사제 천사의 일에 대해서 아뢰다.
의주 목사(義州牧使) 김백순(金伯醇)이 동지사 선래 통사(先來通事)의 말을 치계(馳啓)하였다.
“사제 천사(賜祭天使)는 이달 초하루에 봉왕 천사(封王天使)는 3일에 출발하 였고,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왕학(王鶴)이 소일효(簫一鴞) 대신으로 오는데, 소일효는 병이 났다고 합니다. 왕학은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 사람으로 갑진년에 출신(出身)했는데 30세이며 성품이 온아하고 문장이 장승헌(張承憲) 천사보다 낫다고 합니다. 제주 표류인 박손(朴孫) 등 12인을 동지사가 데리고 온다 합니다.”
22) 명종실록 4권, 명종 1년 12월 28일 신해 1번째기사 / 유진동ㆍ조언수ㆍ민세량ㆍ한두ㆍ김백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유진동(柳辰仝)을 승정원 도승지로 조언수(趙彦秀)를 좌승지로 민세량(閔世良)을 우승지로 한두(韓㞳)를 좌부승지로 채세영(蔡世英)을 우부승지로 김백순(金伯醇)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 명종ㆍ선조실록
(행 통훈대부 사헌부집의 지제교 휘 규, 行通訓大夫 司憲府執義 知製敎 諱戣)
1)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 4월 3일 임진 1번째 기사 / 녹음대에 나아가유생에게 강경 시험을 보게 하다.
상이 녹음대(綠陰臺)에 나아가 유생(儒生) 40명에게 강경 시험을 보였는데진사 심화(沈鏵) 등 8명이 합격되었다.이어‘원중시유송(苑中試儒頌)’이란 어제(御題)를 내고 지어 바치게 하였다. 시관(試官)들【상진(尙震)ㆍ이준경(李浚慶)ㆍ심통원(沈通源)ㆍ김명윤(金明胤)ㆍ정사룡(鄭士龍)ㆍ권철(權轍)ㆍ오겸(吳謙)ㆍ정유길(鄭惟吉)ㆍ신희복(愼希復)ㆍ이양(李樑)이다.】 이 과차(科次)하여 입계하니, 전교하기를, “강경과 제술의 분수(分數)를 통계해서 서계(書啓)하라. 오늘의 행사는 유림(儒林)을 용동(聳動)시키려는 것인데, 만약 제술만을 주로 하면 강경의 의의가 없어지고 강경만을 주로 하면 제술의 의의가 없어질 터이니, 경들은 이를 참작하여 중도(中道)에 맞도록 함께 의논해서 아뢰라”하였다.
【심화(沈鏵)는 심통원의 아들로《역경(易經)》에서 통(通)을 맞았으나 제술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는데 상이 뜻하는 바가 있었으므로 이 전교를 내린 것이다.】시관이 아뢰기를, “평소 과장(科場)의 사례에서 강획(講劃)이 많으면 비록 제술이 없어도 그 방(榜)에 참여하고, 제술이 높은 등급에 들면 강획이 3푼 반 【식년(式年) 강경에서 맞은 순조(純粗)의 점수이다.】 이라도 방에 참여하였는데, 지금 분수를 서계하라 하시니, 몇 점 이상부터 출신(出身)시킬지의 여부는 성단(聖斷)에서 나와야 합니다.”하니, 상이 유학(幼學) 홍성민(洪聖民) 등에게 차등 있게 급제(及第)를 내렸다.【상이 직접 방목(榜目)을 써서 내렸는데 갑과(甲科)는 홍성민이고 을과(乙科)는 심화(沈鏵)이고 병과(丙科)는 김규(金戣)ㆍ이정빈(李廷賓)ㆍ허사흠(許思欽)이다. ○처음에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도기 원점(到記圓點)을 가져오도록 명한 뒤에 많은 선비들이 반드시 다 입시(入試)하게 되리라고 크게 기대했었는데, 이에 이르러 상의 낙점을 받은 유생은 겨우 40명이었고 그 가운데도외척(外戚)의 자제가 많이 끼었다. 또 강경에 응시 한 유생 8명 중에 5명을 취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제술에 합격하지 못한 심화를 구차히 참방(參榜)시켰다. 게다가 이정빈(李廷賓)은 이양(李樑)의 아들이고, 김규는 해안군(海安君)의 사위였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사람을 뽑는 데 있어 공정하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여겼다.】
2) 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 12월 16일 기묘 1번째 기사 / 이희검ㆍ홍천민ㆍ이중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희검(李希儉)을 승정원우승지로,홍천민(洪天民)을 예조 참의로, 이중호(李仲虎)를 홍문관 부교리로, 최정(崔頲)을 형조 정랑으로, 김명원(金命元)을 홍문관 수찬으로, 김첨경(金添慶)을 성균관 사성으로, 김규(金戣)를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3)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 10월 4일 신유 4번째 기사 / 이탁ㆍ박영준ㆍ이중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탁(李鐸)을 공조 판서로, 박영준(朴永俊)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중호(李仲虎)를 집의로, 권덕여(權德輿)와 신담(申湛)을 장령으로, 구사맹(具思孟)을 사간원 사간으로, 김규(金戣)와 황정욱(黃廷彧)을 사헌부 지평으로, 기대승(奇大升)을 사간원 헌납으로, 민시중(閔時中)을 홍문관 교리로, 한효우(韓孝友)를 병조 정랑으로, 이증(李增)과 정탁(鄭琢)【별로 기국과 도량이 없었는데, 바른 길로 가려는 마음이 있어서 명사(名士)들에게 인정을 받아 교서(校書)에서 발탁, 제수되었다.】을 사간원 정언으로, 이항(李恒)을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박순(朴淳)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삼았다.
4) 명종실록 34권, 명종 22년 3월 4일 기미 1번째 기사 / 정대년ㆍ구사맹ㆍ이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대년(鄭大年)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구사맹(具思孟)을 집의로, 이기(李墍)ㆍ이충작(李忠綽)을 장령으로, 김규(金戣)ㆍ황윤길(黃允吉)을 지평으로, 오건(吳健)을 사간원 정언으로,박소립(朴素立)을 홍문관 응교로, 신응시(辛應時)를 수찬으로, 이선(李選)【추루하고 무식하여 권세에 붙기를 좋아하였다. 이양이 한창 득세할 때 날마다 그 집에 달려가 그의 지휘를 들었는데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을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삼았다.
5) 명종실록 34권, 명종 22년 6월 24일 정미 3번째 기사 / 박소립ㆍ안자유ㆍ권덕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소립(朴素立)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안자유(安自裕)를 의정부 사인으로, 권덕여(權德輿)를 홍문관 부교리로, 김규(金戣)를 병조 정랑으로, 오건(吳健) ㆍ김효원(金孝元)을 병조 좌랑으로, 윤탁연(尹卓然)을 승정원 주서로 삼았다.
6) 명종실록 1권, 부록 / 편수관 명단
융경(隆慶) 5년 4월 20일,춘추관(春秋館)에서 삼가 왕명을 받들어 찬진 (撰進)하였다. 전후의 관원을 아울러 기록한다.
(생략) 경연 시독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김규(金戣)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 연 시독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유도(柳濤) 중훈 대부(中訓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시독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 정언지(鄭彦智)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 (중략)
7)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 11월 7일 무오 1번째 기사 / 당시의 육조 당상관과 당하관의 명단
이때 이조 판서는 박영준(朴永俊), 참판은 이문형(李文馨), 참의는 강사필(姜士弼), 정랑(正郞)은 이제민(李齊閔)과 이산해(李山海), 좌랑(佐郞)은 이이(李珥)ㆍ정유일(鄭惟一)ㆍ구봉령(具鳳齡)이고 호조 판서는 홍담(洪曇), 참판은 윤의중(尹毅中), 참의는 이지신(李之信), 정랑은 이경명(李景明)과 김부인(金富仁), 좌랑은 허진(許晉)ㆍ유덕수(柳德粹)ㆍ노기(盧祺)이고, 예조 판서는 박충원(朴忠元), 참판은 오상(吳祥), 참의는 임내신(任鼐臣), 정랑은 정언지(鄭彦智)ㆍ황정욱(黃廷彧)ㆍ윤강원(尹剛元), 좌랑은 이해구(李海龜)ㆍ권징(權徵)이고, 병조 판서는 원혼(元混), 참판은 정대년(鄭大年), 참의는 이희검(李希儉), 참지(參知)는 박근원(朴謹元), 정랑은 권극례(權克禮)ㆍ황윤길(黃允吉)ㆍ김규(金戣), 좌랑은 이정암(李廷馣)ㆍ김효원(金孝元)ㆍ오건(吳健)ㆍ임국로(任國老)이고,형조 판서는 김개(金鎧), 참판은 남궁침(南宮忱), 정랑은 장범(張範)ㆍ황인(黃璘)ㆍ황윤중(黃允中)ㆍ박난영(朴蘭榮), 좌랑은 홍인지(洪仁祉)ㆍ권붕(權鵬)ㆍ유균(柳均)ㆍ안용(安溶)이고, 공조 판서는 유잠(柳潛), 참판은 김홍윤(金弘允), 참의는 최옹(崔顒), 정랑은 임윤신(任允臣)ㆍ이예열(李禮悅)ㆍ성자제(成子濟), 좌랑은 이정립(李挺立)ㆍ김경헌(金景憲)ㆍ정욱(鄭彧)이었다.
8) 선조실록 4권, 선조 3년 5월 18일 을유 4번째 기사 / 신희남ㆍ김규ㆍ권극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부수찬 신희남(愼喜男)을 장령에, 김규(金戣)를 부교리에, 권극례(權克禮)를 부수찬에 제수하였다.
9) 선조실록 4권, 선조 3년 5월 21일 무자 1번째 기사 / 박계현ㆍ권덕여ㆍ김규ㆍ안용ㆍ유희림ㆍ이식ㆍ신담ㆍ박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계현(朴啓賢)을 대사헌으로, 권덕여(權德輿)를 집의로, 김규(金戣)를 장령으로, 안용(安容)ㆍ유희림(柳希林)을 지평으로, 이식(李拭)을 대사간으로, 신담(申湛)을 사간으로, 박점(朴漸)을 정언으로 삼았다.
10) 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12월 17일 기사 1번째 기사 / 이이ㆍ신희남ㆍ김규ㆍ신점ㆍ우성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어제 정사가 있었다. 이이(李珥)를 응교로, 신희남(愼喜男)ㆍ김규(金戣)를 교리로, 신점(申點)을 수찬으로, 우성전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1월 4일 을유 1번째 기사 / 이후백ㆍ박대립ㆍ이양원ㆍ박승임ㆍ김첨경ㆍ신희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후백(李後白)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박대립(朴大立)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양원(李陽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승임(朴承任)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첨경(金添慶)을 판결사(判決事)로, 신희남(愼喜男)을 집의(執義)로, 유희림(柳希霖)을 장령(掌令)으로, 김규(金戣)를 교리(校理)로, 정지연(鄭芝衍)을 지평(持平)으로, 조정기(趙廷機)를 수찬(修撰)으로, 이경명(李景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2)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1월 27일 무신 1번째 기사 / 야대에 김규ㆍ홍성민이 입시하다.
상(上)이 야대(夜對)를 명하였다. 교리 김규(金戣), 부교리 홍성민(洪聖民)이 입시하였다.
13)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1월 28일 기유 1번째 기사 / 박영준ㆍ이문형ㆍ윤복ㆍ김규ㆍ신응기ㆍ신응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노수신(盧守愼)이 병이 나아 출사(出仕)하여 숙배(肅拜)하였다. 이날 정사(政事)가 있었는데, 박영준(朴永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문형(李文馨)을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윤복(尹復)을 집의(執義)로, 김규(金戣)를 사간(司諫)으로, 신응기(辛應基)를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신응시(辛應時)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14)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3월 22일 임인 1번째 기사 / 유희춘ㆍ이해수ㆍ한효우ㆍ조유성ㆍ조보ㆍ조정기ㆍ권덕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정청(政廳)이, 재상(宰相)들이 대부분 호조(戶曹)의 일로 추고를 받았으므로 대사헌(大司憲)의 망(望)에 넣을 수 있는 자가 유희춘(柳希春) 한 사람뿐이라고 아뢰니, 상이 단망(單望)으로 주의(注擬)하라고 명하였다. 이 정사에서 이해수(李海壽)를 집의(執義)로, 한효우(韓孝友)ㆍ조유성(趙惟誠)을 장령(掌令)으로, 조보(趙溥)ㆍ조정기(趙廷機)를 지평(持平)으로, 권덕여(權德輿)를대사간(大司諫)으로, 김규(金戣)를 사간(司諫)으로, 이현배(李玄培)를 헌납(獻納)으로, 홍인건(洪仁健)ㆍ이성중(李誠中)을 정언(正言)으로, 권철(權轍)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정지연(鄭芝衍)을 부교리(副校理)로, 신점(申點)을 수찬(修撰)으로, 윤복(尹復)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5)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4월 21일 경오 1번째 기사 / 사간 김규가 왜인의 험포란 무게를 다는 일이었다고 변명하여 물의가 나다.
어제 사간 김규(金戣)가 피혐(避嫌)하여 아뢰기를, “신이 지난 임신년 6월 사간이었을 때에 예조(禮曹)가 병조(兵曹)에 보낸 공문을 보니,예조의 낭관(郞官)은 왜관(倭館)에 가지 않고다만 병조의 낭청郞廳)이 칭량(稱量)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예조ㆍ병조의 낭청을 시켜 왜관에 같이 가서 험포(驗包)하여 무게를 알아보는 일을 살피게 할 것을 아뢰었는데, 험포라는 것은 행탁(行橐) 안에 든 것을 점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근년에 부경(赴京)하는 사신이 돌아올 때에는 떠날 임시에 예부(禮部)의 제독 주사(提督主事)가 병부(兵部)의 낭관과 함께 포자(包子)의 수를 살펴서 적당히 차량을 주어 이것으로 방금(防禁)할 뿐입니다.
신이 논한 뜻은 오로지 남태(濫駄)의 폐단을 막고자 험포하여 무게를 알아보자는 데에 있을 뿐이니, 실로 임신년에 병조가 이현(李俔)의 말에 따라서 아뢴, 병조를 시켜 중국에서 험포하는 예에 따라 행탁을 조점(照點)한다는 것과는 조어(措語)가 아주 다른데 해조(該曹)가 승전(承傳)에 있는 험포하여 무게를 알아본다는 말을 살피지 않고 문득 낭청을 시켜 포자를 풀어 점검하려 했습니다. …”하였으니, 김규가 잘못을 꾸미고 말을 공교히 하는 것이 심하다. 대사간(大司諫) 이산해(李山海)가 아뢰기를, “사간 김규는 전에 사간이었을 때에 험포한다는 것과 무게를 알아 본다는 것은 말은 다르나 뜻은 같다고 했는데, 험포한다는 것과 무게를 알아 본다는 것이 과연 같은 것이라면 중국말을 빌어 써도 무방하겠습니다. 다만,《속록(續錄)》에 ‘짐의 경중을 달아 본다.’ 한 것은 다만 경중을 달아서 그 남태를 막는 것이고, 험포라는 것은 그 싼 물건을 검사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이 법을 쓰는 것은 실로 금하는 물건을 함부로 무역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신이 부경(赴京)에 가장 익숙한 통사(通事)들을 불러서 물었더니, 전부터 예부의 제독 주사와 병부의 거가사 낭중(車駕司郞中)이 옥하관(玉河關)에 가서 혹 한두 포자를 뽑아내었다가 준 때도 있었는데 근년 이래로 혹 짐의 수만을 헤아리고 포자를 풀지 않으나, 험포의 뜻은 경중을 다는 것과 다르다 합니다. 김규는 근년에 포자를 풀어 조점한 예만을 알고 전부터 혹 검사한 때도 있었다는 것을 몰라서, 중국의 험포를 우리나라에서 칭량하는 법과 같은 것으로 돌려, 조종 때부터 시행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본의를 따져 보면 왜노(倭奴)의 남태를 폐단을 막으려는 데에 있었더라도 논계한 말은 과연 부실한 병폐를 면할 수 없으니 갈아 차출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6)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5월 6일 을유 2번째 기사 / 정언 김성일이 왜인의 험포에 대해 변명한 김규의 일로 체직으로 청하다.
정언(正言) 김성일(金誠一)이 피혐(避嫌)하여 아뢰기를,“사간(司諫) 김규(金戣)는 전에 본직(本職)에 있을 때에 정언신(鄭彦信)ㆍ홍인건(洪仁健) 등과 함께 왜인에 대하여 험포(驗包)할 것을 논계(論啓)하였으니, 한자리에 같이 앉아서 피차가 그 논의를 상론하며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접때 계사(啓辭)가 부실하였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함께 사피(辭避)할 즈음에 정언신과 홍인건은 곧바로 험포가 짐을 열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책하여 자기의 죄라 하였으나, 김규는 도리어 칭량(稱量)이 그 본의라 하고 포자(包子)를 열어서 조점(照點)한 것은 해관(該官)의 잘못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포자를 풀어보는 험포와 칭량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 계초(啓草)를 보면 피하는 말이 많이 나오니, 이것은 김규가 계사가 부실하였던 허물을 면하려 하여 스스로 잘못을 꾸며 감추는 데에 빠지는 잘못임을 모른 것입니다. 그가 임금을 속이고 조정을 속인 정상이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으니,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겠으며 하늘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에 사직(史職)에 있었으므로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늘 그가 탑전(榻前)에서 아뢰는 말을 들었는데, 번번이 간사하게 아첨하고 뜻을 맞추는 꼴이 있었으므로 그 심술(心術)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이제 이 일을 보았으므로 서로 용납하여 같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하고, 대사간 홍천민(洪天民) 등이 와서 아뢰기를, “김성일이 아뢴 것에 동료와 맞지 않는다 하였는데, 험포(驗包)에 관한 한 가지 일은 과연 의논이 맞지 않는 것이 있으나 중론(重論)한 일에 있어서는 신들이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동료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갈아 주소서.”하였다.
17)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5월 6일 을유 3번째 기사 / 대사헌 박근원이 김규의 일과 관련된 관원의 출사를 아뢰다.
대사헌 박근원(朴謹元) 등이 아뢰기를, “대사간 홍천민 등은 김규의 계사가 마땅하지 않아서 서로 용납하지 못할 형세인줄 알면서도 곧 김규를 갈도록 논하지 않았으니, 갈으소서. 사간 김규는 동료의 논척(論斥)을 두드러지게 받았으므로 벼슬에 있기 어려운 형세이니, 홍천민 등과 김규는 모두 갈아 차출하도록 명하소서. 정언 김성일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갈아 차출하는 일은 아뢴 대로 윤허한다. 다만, 김성일은 동료와 함께 의논 하지 않고 경솔히 홀로 아뢰었으므로 뒤폐단이 없지 않으니, 아울러 갈라.”하였다.
18)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5월 7일 병술 1번째 기사 / 대사헌 박근원 등이 김규를 중론한 김성일의 체차와 관련, 체직을 청하다.
대사헌(大司憲) 박근원(朴謹元), 장령(掌令) 유희림(柳希霖) 등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김성일이 피혐할 즈음에 김규를 중론한 말은 평소의 소견을 아뢴 것이니, 대개 임금 앞에서 감히 그 품은 뜻을 다 아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요. 다른 논사(論事) 때에 동료와 의논하지 않고 지레 홀로 아뢴 것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신들이 김성일의 출사를 청하였다가 성명(聖明)에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대간을 경시(輕視)하는 풍조가 신들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신들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대사헌 등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출사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19)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7월 17일 을미 1번째 기사 / 원혼ㆍ성세장ㆍ이후백ㆍ윤의중ㆍ유희춘ㆍ노신ㆍ유도ㆍ김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가 있었다. 원혼(元混)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성세장(成世章)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이후백(李後白)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윤의중(尹毅中)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유희춘(柳希春)을 겸 동지경연(兼同知經筵)으로, 노진(盧禛)을 동지춘추(同知春秋)로, 유도(柳濤)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김규(金戣)를 집의(執義)로, 이해수(李海壽)를 사간(司諫)으로, 유희림(柳希霖)을 장령(掌令)으로, 신점(申點)을 홍문 교리(弘文校理)로 삼았다.
20)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7월 21일 기해 1번째 기사 / 집의 김규가 숙배한 후에 말이 많았는데, 김성일과 사이가 불편하다.
집의 김규(金戣)가 숙배(肅拜)한 뒤에 계사(啓辭)가 매우 많았는데, 스스로 변명한 말이 많았고 ‘김성일(金誠一)이 뜻을 둔 데가 있어서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상이 답하였다.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21) 선조실록 7권, 선조 6년 7월 21일 기해 5번째 기사 / 헌부가 집의 김규를 체차하라고 청하다.
헌부(憲府)가 아뢰기를,“집의 김규(金戣)가 사직(辭職)한 일에는 사림(士林)이 서로 헐뜯는 조짐이 두드러지게 있고 경석(經席)에서 중하게 배척을 받았으므로 벼슬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갈으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선조실록ㆍ광해군 일기
(자헌대부 훈련대장 휘 준계, 資憲大夫 訓鍊大將 諱 遵階)
1)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4일 신해 2번째 기사 / 비변사가 한산도 대첩에서의 승리에 대한 상을 논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서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
“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
2) 선조실록 75권, 선조 29년 5월 30일 병신 3번째 기사 / 사헌부가 형률을 남용한 영암 군수 김준계의 파직을 청하다.
사헌부가 전에 아뢴 최원(崔遠)을 파직하기를 청한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영암(靈巖)에 사는 상인(喪人) 임남룡(林南龍)이 본부(本府)에, 그 아비 임협(林浹)과 동호인(同戶人) 진세(眞世)가 중대하지 않은 일로 모두 군수(郡守)에게 장살(杖殺)되었다고 정장(呈狀)하였습니다. 신들이 그 추안(推案)을 가져다 살펴보니, 지난해 명사(明使)가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본군(本郡)이 지응(支應)한 물건을 임협(林浹)ㆍ진세(眞世) 등에게 주어 남원참(南原站)에 진배(進排)하게 하였는데, 미처 날라다 가 바치지 못한 까닭으로, 군수 김준계(金遵階)가 색리(色吏)가 모함하는 말만 듣고 때를 타서 곤장을 많이 때려 두 사람을 모두 곤장으로 인해 죽게 한 것인데 그 고한(辜限)을 살펴보면 겨우 하루 이틀이 지났을 뿐입니다. 정률(正律)로 결단할 수는 없으나, 초복검(初覆檢)에 나타난 사인(死因)은 다 매를 맞아 죽은 것으로 적혀 있으니, 남형(濫刑)하여 살인한 죄가 분명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감사(監司) 홍세공(洪世恭)은 작지 않은 살인의 옥사(獄事)를 한 해가 지나도록 지체하여 한 번도 구문(究問)하지 않아서, 색리(色吏)와 집장인(執杖人) 등이 모두 달아나게 하였으니, 부당하게 관리를 감싸고 인명을 경시한 죄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추고하도록 명하소서.”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최원의 파직은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4) 선조실록 117권, 선조 32년 9월 16일 임술 3번째 기사 / 송순ㆍ 홍이상ㆍ경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순(宋諄)을 좌부승지로, 홍이상(洪履祥)을 춘천 부사로, 경섬(慶暹)을【김신국과 남이공을 받들어 섬겨 오직 그의 지시를 따르므로 당시 사람들이 비웃었다.】필선으로, 이덕형(李德泂)을 지평으로, 이유홍(李惟弘)을 수찬으로, 이정험(李廷馦)을 부수찬으로, 이신원(李信元)을 병조 좌랑으로, 이선복(李善復)을 검열로, 김용(金涌)을【봉명 사신이 되었을 때 주색에 빠졌고 호령이 문란하였었다.】선산 부사로, 김준계(金遵階)를 동래 부사로, 신충일(申忠一)을 김해 부사로 삼았다.
5) 선조실록 118권, 선조 32년 10월 19일 을미 1번째 기사 / 헌부가 동래부는 중요 지역이므로 부적절한 부사 김준계을 체차할 것을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동래부(東萊府)는 적과 서로 마주 대하고 있어 세 고을을 합하여 큰 진(鎭)을 만들고 승격시켜 부사를 둔 것은 참으로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용렬한 사람에게 맡겨 중요한 시기에 임하여 변고에 대응하는 데 있어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면 틀림없이 한없는 후회는 남기게 될 것입니다. 새로 임명된 부사 김준계(金遵階)는 사람됨이 용렬하여 앞서 남쪽 변방의 수령이 되었을 때에는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파면 당했었습니다.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은 결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시고 무사 중에서 계략과 사려가 있는 사람을 각별히 가려 뽑아 보내소서.”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김준계를 체직(遞職)해야 할지의 여부를 비변사에 물어서 아뢰라.”하였다.
6) 선조실록 118권, 선조 32년 10월 19일 을미 3번째 기사 / 비변사가 동래 부사 김준계를 체직하지 말 것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준계가 아주 적합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도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체임(遞任)하지 않는 것이 타당할 듯 하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7) 선조실록 118권, 선조 32년 10월 20일 병신 2번째 기사 / 헌부가 동래 부사 김준계의 체차를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헌부가 잇따라 동래 부사 김준계(金遵階)를 체차하는 일로 아뢰니, 답하였다. “체차할 필요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
8) 선조실록 118권, 선조 32년 10월 21일 정유 5번째기사 / 헌부가 김준계의 체차를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헌부가 잇따라 김준계(金遵階)를 체차할 일로 아뢰자, 체차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다.
9) 선조실록 126권, 선조 33년 6월 15일 병술 3번째 기사 / 비변사에서 일본 사신의 동태와 일본에 답서를 보내는 일로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김준계(金遵階)가 본사(本司)에 첩정(牒呈)하기를 ‘왜사(倭使)는 지난날 8일 중국 장수 등이 연회를 베풀고 호송한 뒤로 바람이 순조롭지 못한 때문에 절영도(絶影島)에 정박하고 있다가 25일 배가 떠났다. 예조(禮曹)의 서계(書契)에 대한 회답은 군관(軍官) 군공정(軍功正) 김달(金達), 교생(校生) 박희근(朴希根),통사(通事) 이희만(李希萬) 등을 각별히 간택하여 바람이 자거든 즉시 본사의 분부에 따라 보낼 계획이다.’하였습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10) 선조실록 130권, 선조 33년 10월 7일 정축 1번째 기사 / 전 동래 부사 김준계를 국문하고 해남 현감 원수의를 파직하다.
장령 윤양(尹暘)이 전계(前啓)한 전 동래 부사 김준계(金遵階)를 잡아다 국문하고 해남 현감 원수의(元守義)를 파직할 것을 내계(來啓)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1) 선조실록 173권, 선조 37년 4월 21일 신축 1번째 기사 / 헌부가 경기 수사 김준계와 제릉 참봉 장광한의 파직을 건의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기 수사 김준계(金遵階)는 조정에서 맡긴 중임을 생각지 않고 오직 군졸들을 침학(侵虐)하여 자신을 살찌우고 윗사람을 잘 섬기는 것만 일삼는 데다 무리한 형벌을 자행하여 포악한 기질을 멋대로 부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루도 곤수(閫帥)의 소임에 있게 할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제릉 참봉(齊陵參奉) 장광한(張光瀚)은집이 능소(陵所)에서멀지 않으므로 수호군(守護軍)에게 폐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능 안의 수목(樹木)에 대해서도 전연 도벌(盜伐)을 금하지 않고 있어 지극히 놀랍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2) 선조실록 186권, 선조 38년 4월 1일 을사 4번째 기사 / 박승종ㆍ홍여순ㆍ권협ㆍ오정방ㆍ김준계ㆍ유영근ㆍ윤이ㆍ이선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승종(朴承宗)을 대사헌으로, 홍여순(洪汝諄)을 행 동지중추부사로,【품성이 흉험하고 몸가짐이 탐포(貪暴)하여 참으로 기탄이 없는 사람이다.】 권협(權悏)을 길창군(吉昌君)으로, 오정방(吳定邦)을 동지중추부사로, 김준계(金遵階)를 충청 병사(忠淸兵使)로,유영근(柳永謹)을 보덕(輔德)으로, 윤이(尹頤)를 필선(弼善)으로,【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며 학식도 없어 춘방(春坊) 보도(輔導)의 직책에 적합하지 않다.】이선복(李善復)을 사인으로, 윤양(尹讓)을 헌납으로, 심즙(沈諿)을 정언으로 유형(柳珩)을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민기(閔機)를 병조 좌랑으로, 이수준(李壽俊)을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양즙(梁諿)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정항(鄭沆)을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기홍헌(奇弘獻)을 순천 군수(順川郡守)로, 이덕연(李德演)을 양성 현감(陽城縣監)으로, 나인(羅訒)을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삼았다.
13) 선조실록 187권, 선조 38년 5월 3일 병자 1번째 기사 / 새 임무를 행하지 않는 유형의 추고 및 장번 내관 나충남의 직무 태만을 헌부가 아뢰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년에 서상룡(徐相龍) 등을 배송(拜送)한 뒤 황제의 칙서를 받지 않은 채 곧장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는 사신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일 뿐 아니라 또한 통관(通官)들이 주선을 잘못한 소치에서 연유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 은(銀)을 바치고 절권(折券)한 것은 자기네 들끼리의 사사로운 일이므로 애당초 조정에 알려야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천자가 하사한 은 80냥을 마음대로 예부(禮部)의 벼슬아치에게 주었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서장관(書狀官) 이명준(李命俊)이 검칙을 잘못한 소치니 함께 추고하게 하소서.위에서 특명으로 황상이 내려준 은혜에서 미달된 은냥은 해사의 은자로 보태 본래의 숫자대로 충급(充給)하게 하였으니, 신들은 성상께서 지성으로 황상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성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단 절권(折券)은 애당초 사사로운 데서 빚어진 것이고 제급도 사사로운 데서 빚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공용(公用)으로 충급하게 한다면 뒤폐단을 막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은자를 충급하게 하신 명을 환수하소서.회령 부사(會寧府使) 유형(柳珩)은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등급을 넘어 재상(宰相)의 반열에 올랐으니, 당연히 감격하여 은혜를 갚고자 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변성(邊城)이 함락되어 전하께서 주야로 근심하시던 끝에 유형을 변경의 임무에 뽑아 제수하였으니 부임하여 방수(防守)하는 일이 하루가 시급합니다. 따라서 유형으로서는 바로 행장을 꾸려 말에 올라 성화같이 달려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병사 김준계(金遵階)는 배사(拜辭)한 지가이미 보름이 지났건만 유형은 도내(道內)에서 처자식을 끼고서 여러 날을 머뭇거리면서 아직도 서울에 올라와 사은(謝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교만하고 기탄없는 죄를 징계치 않을 수 없습니다. 추고하여 중벌로 다스리소서.
관작(官爵)의 외람됨이 지금처럼 심한 때가 없습니다. 행 사정(行司正) 민열도(閔閱道)는 단지 일시의 시사(試射)에서 연이어 괴원(魁元)을 차지하였다 해서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중한 가자(加資)를 제수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성명(成命)을 환수하여 명기(名器)를 소중하게 하소서. 내시(內侍)는 문을 지키고 명을 전달하는 것이 그의 직분입니다.
장번 내관(長番內官) 나충남(羅忠男)은 이달 1일 명을 받들고서도 전하지 않은 채 사사로이 자기의 집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의 만홀하고 불경스러운 죄는 추고만 하고 말 수가 없습니다. 잡아다가 추국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민열도의 가자는 방해될 것이 없다. 나충남은 이미 추고하게 하였으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14)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7일 무술 2번째 기사 / 충청 병사 김준계의 탄핵ㆍ속오군 충정ㆍ별시 초시를 서울에서 거행할 것 등에 관한 간원의 상소문
간원이 아뢰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 김준계(金遵階)는 처사가 전도되고 호령이 엄하지 않아 군사를 초출할 때 전연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거기다가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는 행구(行具)와 문부(文簿)를 모두 도둑맞기까지 하여 온 도내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루도 곤임(閫任)에 둘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속오군(束伍軍)을 충정(充定)하는 일은 실로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에서 나온 것이라서 의당 제때에 거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기의 열읍이 참혹한 피해를 입어 고난에 시달리는 백성이 떠돌다가 구학에 뒹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어루만져 안집시키기를 시급히 해야 하는데 이러한 첨정(簽丁) 때문에 민심이 날로 소란하여 조석을 보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훗날의 걱정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니, 명년 가을을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괜찮겠습니다.경기의 속오군 충정에 관한 공사를 거행하지 마소서. 나라에 막대한 경사가 있어 별시(別試)로 인재를 뽑을 때 반드시 서울에 모이게 하는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별시에는 서울과 지방으로 나누어 실시하니, 사체가 구차할 뿐 아니라 몇 달 안에 과장(科場)을 겹쳐 설치해야 하고 경시관(京試官)을 접대하는 비용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일이 많고 흉년이 든 해를 당하여 민생의 조그마한 폐단이라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별시 초시를 모두 서울에서 보일 것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속히 결정하게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윤허한다. 속오군의 일은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이는 군정(軍政)에 관계된 것이다. 명년 가을을 기다려 시행하면 남쪽의 왜적과 북쪽 오랑캐의 변란에 아마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의논하여 조처하라.”하였다.
16) 선조실록 218권, 선조 40년 11월 19일 무신 4번째 기사 / 이상신ㆍ최기ㆍ 김대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상신(李尙信)을 경상도 관찰사로, 최기(崔沂)를 충청도 관찰사로, 김대래(金大來)를 사간원 사간으로, 김준계(金遵階)를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박승업(朴承業)을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홍경소(洪敬紹)를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송선(宋瑄)을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송석경(宋錫慶)을 광흥창 수(廣興倉守)로, 이창후(李昌後)를 천안 군수(天安郡守)로,윤홍(尹宖)을 금교 찰방(金郊察訪)으로 삼았다.
17) 광해군일기[중초본] 3권, 광해 즉위년 4월 28일 갑신 3번째 기사 / 추국청에서 하대겸의 공초에 관해 아뢰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효일은 낙형을 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는데, 병세가 극히 중해 서둘러 형장을 더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하대겸(河大謙)은 여러번 중한 형벌을 하여도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낙형을 하자, 이와 같이 공초하였습니다.죽음에 이르러 어지럽게 한 말들은 비록 반드시 다 사실일 수는 없으나 말들이 극히 흉칙하니, 말이 미친 배흥립은 나문해야 하겠습니다. 이른바 박진남(朴震南)의 매부(妹夫)전라도사는 윤수겸(尹守謙)인 듯합니다. 지금 무슨 일로 서울에 올라와 있는 중이니, 이도 잡아다 문초하면 어떻겠습니까?
김준계(金遵階)ㆍ이순신(李純信)ㆍ성윤문(成允文)ㆍ한룡(韓龍) 등은 모두 이 사람의 공초에서 나왔는데 단서가 이미 드러났다고 할 만합니다. 성윤문ㆍ한룡은 형벌로 심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쪽 관왕묘(關王廟)에서 김준계와 이순신이 모이어 의논했다는 말은 대겸이 종이종(種伊從) 등에게 들었다고 하였는데 전일 종이종 등의 공초는 하대겸의 공초와 대부분 서로 같지 않으니, 종이종 등을 다시금 한 곳에서 대질한 뒤 처치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대겸은 임해(臨海)와 한마음이 되었으니, 여러 일에 대해 단연코 모를 리 없을 것인데, 끝까지 캐물은 뒤에야 비로소 단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자상하게 공초를 살펴보면 말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하고, 저는 같이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흉악한 속임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실로 죽음에 이르러 난잡하게 한 말들이 아니다. 매번 면질만 시켜 옥사의 체모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이순신ㆍ김준계 등은 잠시 면질을 시키지 말고 대겸의 공초로 다시금 추문(推問)하되, 그의 말에 관련된 사람들은 아울러 즉시 잡아다 국문하라. 김천우(金天遇)ㆍ환어사(喚御史) 등은 서울에서는 포도청이 주동이 되고 각 지방에서는 도사를 각도 관찰사에게 보내어 그들과 함께 상의하여 비밀리 수소문하여 기어이 잡도록 하라. 대개 도망다니는 죄인 환어사ㆍ윤금이(尹金伊)ㆍ말질치(末叱致) 등을 지금까지 잡지 못하니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만하다. 다시 더욱 신칙(申飭)하라. 성윤문의 앞뒤 사연은 별로 다름이 없으니, 잠시 형장을 멈추어 그대로 가둬두고 대겸은 별도로 다른 곳에 두어 여러 도적들과 섞여 있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이 밖에 문신과 무신들로서 드나들며 모의한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금 더 자상하게 하가(河哥) 도적놈을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19) 광해군일기[중초본] 7권, 광해 즉위년 8월 28일 임오 2번째 기사 / 병조가 거상 중에 있는 자를 기복시키는 일에 대해 아뢰다.
병조가 아뢰기를, “외방에 나가 있는한산무장(閑散武將) 중 쓸 만한 사람을 비변사와 같이 의논하여 뽑아내고, 장령(將領)에 걸맞는 사람으로서 거상 중(居喪中)에 있는자를 기복시키는 일도 같이 의논하였습니다. 행 부호군 김태허(金太虛)ㆍ김억추(金億秋)ㆍ최보신(崔輔臣)ㆍ홍유의(洪有義)ㆍ유승서(柳升緖)ㆍ이계선(李繼先)ㆍ유지신(柳止信)ㆍ원열(元悅)ㆍ이천문(李天文)ㆍ이홍사(李弘嗣)ㆍ홍대방(洪大邦)ㆍ차은로(車殷輅), 전 병사 정응성(鄭應星), 행 사맹 신경징(申景澄), 전 사용 이덕일(李德一), 전 부사 김준계(金遵階), 행 부사과 홍건(洪建), 행 부사직 박정관(朴丁寬), 전 사용 이대남(李大男) 등은 그들이 있는 각도의 고을에 이문을 띄워 올라오도록 하되, 김태허의 경우는 하유를 하는 것이 옳을 듯하고, 거상 중에 있는 자를 기복시키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기 때문에 함부로 의논하기 어렵다고 하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기복의 일도 알았다.”하였다.
20) 광해군일기[중초본] 22권, 광해 1년 11월 23일 경자 6번째 기사 / 변응성ㆍ김준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변응성(邊應星)을 경기 수사로, 김준계(金遵階)를 충청 병사로 삼았다.
21) 광해군일기[중초본] 33권, 광해 2년 9월 18일 경신 3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황주 판관과 충청 병사를 교체하기를 청하니 들어주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함흥부(咸興府)는 물산이 많고 땅이 넓어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일컬어졌는데, 더구나 지금은 북방 변경에 일이 많아 방비하고 책응할 일이 평일보다 훨씬 중대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임 판관 전유형(全有亨)은 성격이 본래 느슨한데다 평소부터 번거로운 업무를 처리할 재주도 없이 일찍이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있을 때 다스리지 못한다는 비난을 현저히 받았으니, 그를 체직시키도록 명하고, 명망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도록 하소서. 충청 병사(忠淸兵使) 김준계(金遵階)는지난 무신년 연간에 적(賊)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여러 차례나 거론되었는데도 요행히 모면하고는 그 뒤에 잇따라 곤수의 직책을 차지하였으므로물정이 이미 지극히 통분해 하며 답답하게 여겼습니다.그런데 급기야 본직을 제수받고 나서는 오로지 능란하게 자기를 살찌울 일만 하면서 살판났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런 사람은 단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를 파직하고 서용(敘用)하지 못하게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김준계는 체차하라.”하였다.
22) 광해군일기[중초본] 33권, 광해 2년 9월 19일 신유 4번째 기사 / 사헌부가 김준계의 파직을 잇달아 청하니 들어주다.
사헌부가 김준계(金遵階)를 파직시킬 일을 연계(連啓)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23) 광해군일기[중초본] 68권, 광해 5년 7월 18일 갑술 3번째 기사 / 왕이 친히 국문하는데, 이춘란의 공초를 받다.
왕이 친히 국문하였다. 이춘란의 공초를 받았다. 춘란은 평안도 부민(富民)인데 익명의 흉서(凶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잡아온 것이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춘란은 두 눈이 모두 어둡고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데 그 서장(書狀)을 저 혼자서 보았는지 다른 사람에게도 보게 하였는지 이 점을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운로(雲老)를 그가 모른다면 이 글도 익명서인데 어떤 방법으로 사실을 캐 내야 하겠습니까?”하였다. 권진이 이춘란의 공초한 것을 가지고 아뢰기를, “그 글을 펴볼 때에 단지 7, 8월이라는 글자만 보았고, 그것이 흉서인 줄을 알고는 경악을 금하지 못한 채 미처 자식들에게 알리기도 전에 서둘러 군수에게 고한 것이니 그밖의 곡절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또 군수가 이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기에, 신이 답하기를「임진사(林進士)라고 하는 사람은 자산(慈山)에 살고, 김병사(金兵使)라고 하는 자는 용강(龍岡)에 사는데 아마 이 사람들을 이른 듯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였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서장 중에 김병사라고 하는 사람은 김응서를 말하는가?”하였는데 춘란이 공초하기를, “서장 중에 단지 김병사라는 글자만 있을 뿐이니 그것이 김응서를 말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비록 낱낱이 지적할 수 있습니다마는 운로(雲老)만큼 분명하게 지적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사실을 캐낼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춘란에게 묻기를, “네가 서찰을 받을 때에 혼자서 받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느냐?”하니, 춘란이 아뢰기를,“저의 종 군이(軍伊)가 훼손된 집의 옛터에서 이 서찰을 받아가지고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간여했는지의 여부는 신이 모릅니다. 그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덕로(李德老)의 공초를 받았다.【이춘란의 아들이다.】왕이 이르기를, “이춘란을 추문하던 예에 의하여 실시하라.”하자, 김병사(金兵使), 김주부(金主簿), 박초관(朴哨官) 등에 대하여 이덕로에게 상세히 묻고 또 약산운로(藥山雲老)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물으니 이덕로가 공초하기를, “운로에 대해서는 근사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하였다.
이덕보(李德輔)의 공초를 받았다.【춘란의 아들이다.】유공량이 아뢰기를, “이 서찰을 볼 때에 누구와 함께 보았는지를 덕보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그의 형이 공초를 할 때에는 대답이 명쾌했는데, 그의 아우는 어찌 그리 말이 군색한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황당합니다.”하였다. 박승종이 아뢰기를,“이 녀석이 지난 해 그의 아버지를 잡아왔을 때에 벼슬살이를 하지 아니하고 내려갔습니다. 전일에 그의 사람됨됨이가 영특해 보였는데 어찌 그리 말이 군색하고 모자란 기가 있어 보인단 말입니까.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하고, 유공량이 아뢰기를, “이춘란이 필시 그의 아들에게 보여주고 상의하여 하였을 것인데, 말을 바꾸어 무고하니 너무 엉뚱합니다.”하고, 심희수는 아뢰기를, "그들 형제가 비록 먼저 보았더라도 반드시 노부(老父)로 하여금 관아에 고발하게 하였을 것입니다.”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 편지를 8월 3일에 받고 5일에 관아에 고발하였으니 그 사이 수삼일 동안 어찌 그의 자식에게 보여주지 않았겠습니까.?”하였다. 군이의 공초를 받았다. 왕이 이르기를, “투서한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군이에게 물어보도록 하라!”하니, 유공량이 아뢰기를, “군이는 춘란의 집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사는데 편지를 전한 자가 어떻게 이씨 집안의 종인지를 알고 전달하였다는 말입니까? 이 점이 몹시 수상합니다.”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투서한 사람의 모습과 나이 및 데리고 온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 군이에게 물어보도록 하라.”하였다. 김응서의 공초를 받았다.
【김응서는 안주(安州) 축성 대장이었는데 흉서 내용 중에 김병사로 적혀 있었다.】왕이 이르기를, “김씨 성을 가진 병사(兵使)가 몇 사람인가?”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김준계(金遵階)는 회령 부사(會寧府使)이고, 김거병(金去病)은 만포 첨사(滿浦僉使)이고, 김태허(金太虛)는 전에 충청 병사를 지냈습니다.”하였다.
24) 광해군일기[중초본] 102권, 광해 8년 4월 25일 갑자 2번째 기사 / 정배지에서 도주한 죄인들을 추적하여 잡게 하고, 관할 수령을 파직하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거제(巨濟)에 정배된 죄인 장추복(張秋福) 등이 도주하였으니 당시 수령 원수의(元守義)와 하경수(河景受)를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갑산(甲山)에 정배된 죄인 상현(相玄) 등이 도주하였으니 전후의 부사(府使)를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경흥(慶興)에 정배된 죄인 노연후(盧連厚)가 도주하였으니 전후의 부사 최진립(崔震立)과 민형(閔泂)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회령(會寧)에 정배된 죄인 박응수(朴應守) 등이 도주하였으니 전 부사 김준계(金遵階)를 파직하고 나서 추고(推考)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이 죄인들은 예사롭게 추적하여 붙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생김새와 나이를 상세하게 적어 각도에 하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착실하게 추적하여 붙잡도록 하라!”하였다.
25) 광해군일기[중초본] 127권, 광해 10년 윤4월 20일 무인 6번째 기사 / 비변사에서 오랑캐 방비책으로 장령을 차출하는 일로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서쪽 변방에는 상국이 징병하는 근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저 적이 이미 준동하는 형세이니 강 연안의 일대를 방어할 계책 또한 급히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강역(疆域)이 환란을 당할 걱정이 지금 이때보다 더 급하게 된 적이 없었는데일이 언제쯤 터질지 예측하기 어려우니,장령(將領)으로 적합한 자로서 가령 김준계(金遵階)ㆍ이인경(李寅卿)ㆍ원사립(元士立)ㆍ최진립(崔震立) 등처럼 뛰어난 무사들 및 기타 쓸 만한 무사로서 시골에 물러가 있는 자들에게병조가 하나하나 통지하여 서울에 집결시킨 다음 지휘를 받도 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파산(罷散)되었거나 상중(喪中)에 있는 자들도 모두 뽑아두고서 급할 때 조발해 쓰도록 하라!”하였다.
26) 광해군일기[중초본] 134권, 광해 10년 11월 6일 신묘 3번째 기사 / 합계하여 훈련 도감 대장 김준계의 삭탈 관직을 청하였으나 직임만 체차하다.
합계(合啓)하기를, “훈련 도감 대장 김준계(金遵階)는 본래 흉패하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일찍이 역적 진(珒)과 친밀하게 교유한 것이 명현(名賢)이나 열도(閱道)의 무리들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 역적들의 공초에 낭자하게 나왔으며, 수상한 자취가 국청의 추안(推案)에 환히 실려 있으니, 나라의 형벌을 모면한 것만도 또한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직에 제수되자 전연 징계하지 않고 군졸들을 침학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도성 아래의 친위병들이 장차 모조리 흩어질 형편입니다. 병력을 주관하는 직임을 결코 이런 사람에게 맡겨둘 수 없으니, 관작을 삭탈하라고 명하소서.”하니, “대장의 직임만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27) 광해군일기[중초본] 134권, 광해 10년 11월 7일 임진 2번째 기사 / 합계하여 김준계의 삭탈 관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합계로 연계하여 김준계(金遵階)의 관직을 삭탈하라고 청했는데, 답하기를, “이미 대장에서 체직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28) 광해군일기[중초본] 159권, 광해 12년 12월 3일 병오 2번째 기사 / 좌승지 이위경이 궁졸을 무고히 죽인 김준계ㆍ원수신의 처벌을 청하다.
좌승지 이위경(李偉卿)이 아뢰기를, “〈삼가〉 남병사 김준계(金遵階)가 원수신(元守身)과 서로 다툰 사연을 보니, 매우 형편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국이 하유하여 준절히 꾸짖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상께서 내리는 하유는 더할 나위 없이 존귀한 것이니, 절도사를 하유한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수령 따위에게 하유하는 것을 어찌 섣불리 할 수 있겠습니까. 준계가 군졸 한명을 목베어 죽인 것은 군법으로 본다면 옳지만 사적인 싸움으로 본다면 그것은 살인입니다.〈살인이 참으로 죄가 없겠습니까? 양쪽 진영이 서로 대적하고 있고, 진격의 북소리가 서로 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 걸음 후퇴한 자를 목베어 죽이고 규정된 지역을 이탈한 자를 목베어 죽이는 것은 진실로 군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도사의 신분으로 여러 읍을 순시하면서 한 순간의 감정으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사냥개를 시켜 짐승잡는 것 처럼 하고는 말하기를 ‘나는 병법을 잘 알고, 군율을 잘 행하였다.’고 한다면 그 행적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조괄(趙括)이 병법을 논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이처럼 망령되이 남을 괴롭히는〈악독한〉사람에게〈주장(主將)이라는〉중대한 책무를 맡긴다면〈나라의 운명이 달린 위급한 때에〉 어떻게 일을 완수하도록 책임지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수신은 지금 막 수령이 되어 감히 절도사 휘하에 있는 관리의 목을 베어 분풀이를 하고자 하였습니다.〈저들이 다투는 것은 어떤 일이며, 그 일이 존중하는 것은 어떤 예법입니까. 안변(安邊)의 군졸이 이미 무고하게 죽었는데, 절도사 휘하의 관리가 또 악독한 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면〈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희롱거리로 삼는 참상을〉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만약 이런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정방의(鄭方義)가 하루에 6천 명의 목숨을 살상한 참화와 같은 일을 오늘날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근래에 무인들의 교만한 버릇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척준언(拓俊言) 같이 포악하고 박진재(朴晉材) 같이흉포한 자를 어찌 차마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 저들에게 하유하시는 것은 임금의 존귀하고 귀중한 체면을 자못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김준계ㆍ원수신 등을 되도록 무거운 벌로 다스리소서.〈그리고 북병사와 함경 감사에게, 군율을 칭탁하여 함부로 인명을 살상한다는 소문은 보고 들음에 매우 놀랍고 참혹한 일이었으니 십분 살펴서 처리하라는 뜻을 각별히 하유하라는 일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비변사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하였다.
29) 광해군일기[중초본] 162권, 광해 13년 윤2월 19일 신묘 3번째 기사 / 마음대로 형벌을 시행한 남병사 김준계를 체차하고 후임을 뽑도록 명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김준계(金遵階)는 전쟁에 임한 상황도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시행하였다는 이유로 이미 추고를 당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불안하여 사직하였는데, 우선은 몸조리를 하고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고〈하유(下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 “준계가 비록 주장(主將)이라고는 하나 이미 전쟁에 임한 상황도 아닌데 사람을 거리낌 없이 베어 죽였다. 무관들이 교만하고 횡포해지는 조짐을 길러주어서는 안 되니, 마땅히 잡아다 국문하여 무거운 벌로 다스려야 할 것인데 본사에서 도리어 몸조리를 하고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고 청하니, 매우 놀랍고 괴이하다. 그러나 묘당의 뜻이 이와 같으니 비록 중하게 심문하는 것은 용서한다 하더라도 먼저 체차하도록 하고, 그 후임자를 잘 뽑아서 천거하도록 하라!”하였다.
【비국이 그대로 임명해 줄 것을 계청한 것은 사사로운 인정을 따른 데서 나온 것이고 왕이 준계를 벌한 것도 실상 원희(元姬)의 아비 원수신(元守身)이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어 준계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이다.】
30) 광해군일기[중초본] 171권, 광해 13년 11월 3일 경자 5번째 기사 / 사헌부가 목천 현감 홍건도와 담장 밖의 대장 김준계의 처벌을 청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목천 현감 홍진도(洪振道)는 〈본래 어그러지고 망녕된 사람으로서 관직 생활이 형편없어 청렴 정직하지 못하다는 비방을 많이 받았으며 오래 전에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직에 제수되자〉가렴주구만을 일삼고 있으며〈지난번 초병(抄兵) 할 때도 남김없이 성책(成冊)하고서 뇌물의 다소에 따라 멋대로 넣고 빼어〉백성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습니다.경치가 좋은 곳이면 처자를 데리고 놀이를 다녀서 민폐를 끼치니〈하루도 그 직책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파면시키고 다시 등용하지 마소서. 담장 밖의 대장 김준계(金遵階)는 지난번에 사직제(社稷祭)를 지내고 음복연 (飮福宴)을 베풀 때에 운검(雲劍)을 차고 입시해 있다가 전좌(殿座) 뒤의 휘장 곁으로 나가서 집에서 가지고 온 밥을 먹고 있었으므로 온 마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보고 놀랐습니다.〈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못하게 하니 즉시 대전의 별감대여섯 명을 좌우로 둘러 서 있게 하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거리낌 없이 계속 먹었습니다〉사판에서 삭제하소서.”하니, 답하기를,“김준계는 추고(推考)하고 홍진도는 천천히 결정하겠다.”하였다.
31) 광해군일기[정초본] 159권, 광해 12년 12월 3일 병오 2번째 기사 / 좌승지 이위경이 군졸을 무고히 죽인 김준계ㆍ원수신의 처벌을 청하다.
좌승지 이위경(李偉卿)이 아뢰기를, “남병사 김준계(金遵階)가 원수신(元守身)과 서로 다툰 사연을 보니, 매우 형편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국이 하유하여 준절히 꾸짖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상께서 내리는 하유는 더할 나위 없이 존귀한 것이니, 절도사를 하유한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수령 따위에게 하유하는 것을 어찌 섣불리 할 수 있겠습니까. 준계가 군졸 한명을 목베어 죽인 것은 군법으로 본다면 옳지만 사적인 싸움으로 본다면 그것은 살인입니다. 이처럼 망령되이 남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중대한 책무를 맡긴다면 어떻게 일을 완수하도록 책임지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수신은 지금 막 수령이 되어 감히 절도사 휘하에 있는 관리의 목을 베어 분풀이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안변(安邊)의 군졸이 이미 무고하게 죽었는데, 절도사 휘하의 관리가 또 악독한 자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면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김준계·원수신 등을 되도록 무거운 벌로 다스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비변사로 하여금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하였다.
▣ 선조실록
(부사과 어모장군 휘 충남, 副司果 禦侮將軍 諱 忠男)
1)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25일 갑진 2번째 기사 / 송유진 등을 국문하다.
적괴 송유진이 궐정으로 들어왔다. 국문하려 할 적에 상이 이르기를, “형신(刑訊)하면 죽을까 염려되니 압슬(壓膝)로 철저히 신문하여 흉모의 절차와 내응인(內應人)을 일일이 추문하라!”하였다. 송유진을 압슬하고 다시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역적 모의는 오원종과 홍근이 하였습니다. 원종이 나에게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경성을 포위하고 서서 3일간 통곡하면 임금이 반드시 허물을 고칠 것이다.’하였고 조보(朝報)와 기타 문서를 원종이 매양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습니다. 정월 2일 이번에 중국 사신이 가지고 온 칙서(勅書)도 가지고 와서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그르다고 한다.’하였습니다. 원종은 단지 승지 조원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올 수 있었다고만 말했을 뿐 조원이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홍근이 나에게 ‘체문(帖文)은 바로 이산겸이 지은 것이다. 천안의 의병 장사준(張士俊)은 바로 장핵(張翮)의 아들인데 그도 대적(大賊)은 바로 산겸이라고 했다. 경성의 내응인은 통사(通事) 윤복은(尹福殷)이다.’하였으며, 원종은 윤충은(尹忠殷)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종은 나에게 ‘경성이 허술하다. 임금이 있는 곳은 모두 울타리로 둘러쳤으니, 2백 명의 군졸만으로도 해볼 수가 있다. 그러나 중국 장수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문(呈文)하려 하는데 너의 아비 택종(澤宗)과 네가 화어(華語)를 대강 아니 네가 가서 이 일을 전적으로 맡으라! 그리고 반드시 갑오일(甲午日)에 청계산으로 오라! 경성을 범할 때에는 모든 군기(軍器)를 상자 속에 숨겨 가지고 부인을 말에 태워 싣고서 경성으로 들어가게 해야 된다. 홍근이 음양(陰陽)을 잘 알기 때문에 갑오일로 택일하였다.’하였습니다.
원종은 경성을 범할 적에 먼저 수원과 용인의 군사를 데리고 들어가려 하였는데, 용인은 그의 어미의 고향이고 수원은 그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직산의 조희성(趙希聖)은 군기의 제조를 감독하였고, 적당(賊黨)은 도훈도(都訓導) 봉유(奉柔),유학(幼學) 윤훈갑(尹訓甲)ㆍ 윤계갑(尹戒甲), 충의위(忠義衛)이삼성(李三省), 수문장(守門將) 배억산(裵億山), 유학 고계남(高季男)ㆍ고중남(高仲男)ㆍ곽인(郭仁), 내금위(內禁衛) 곽대남(郭大男)이고, 군량을 조달하는 사람은 천안의 별감(別監) 김응신(金應臣)과 청주(淸州)에 사는 조관(朝官) 김충남(金忠男)이고, 홍우(洪瑀)ㆍ홍난생(洪蘭生)은 좌우장(左右將)이 되고, 나는 홍근(洪瑾)과 함께 문서 차지(次知)가 되었습니다. 이산겸을 만나보고자 했으나 만날 수가 없었고, 노일개(盧一凱)라는 사람은 만나보았습니다. 승려 일현(一玄)의 말에 의하면 가야산의 적괴는 얼굴이 얽고 수염이 없는 문사(文士)라고 하는데 일도(一道)가 모두 여대로(呂大老)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화가 아니고 거적(巨賊)의 꾐을 받아서입니다. 거적은 산겸인데 밤에 사람을 보내어 결박하였습니다.”하였다.
오원종은 압슬형을 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으므로 또 낙형(烙刑)을 가하였는데도 자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이 칙서를 보고서 역모할 생각을 내었으니 원종의 사람됨이 매우 흉악하다.”하니, 장운익이 아뢰기를, “죄인에게 압슬형을 가하면 장(杖)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적처럼 참아 내는 자는 아직 있지 않았습니다. 매우 흉악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우ㆍ홍근ㆍ홍난생 등 3인을 불러서 칙서를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물어보라!”하였다. 즉시 홍우 등을 궐정으로 불러 물어보니 모두 아뢰기를, “박정자(朴正字)라고 하는 사람이 미륵사(彌勒寺)에서 칙서를 보여 주었는데 그때 함께 본 사람은 김천수(金天壽)입니다. 송유진이 ‘중국 사람들도 이러하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았을 것이다.’하고는 즉시 신발 속에다 넣었습니다.”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12월에 김충남(金忠男)이 신에게 서간을 보내기를, ‘근처에 적당들이 횡행하고 있으니 속히 조처하여 체포하라.’고 하였으니, 역적들의 공초에서 일컬은 김충남이 바로 이 사람이라면 반드시 적에게 부화(附和)하였을 리가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임 관원인가?”하였다. 심희수가 아뢰기를, “전에 조관(朝官)이었는데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역모(逆謀)를 몰랐다면 곡식을 지급하였을 것 같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의병이라 일컬었다면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입에서 거론된 통사 윤충은(尹忠殷)도 추문해야 하는가?”하였다.
즉시 윤충은을 잡아다가 추문하니 오원종이란 자는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족속(族屬)도 아니라고 하였다. 오원종에게 물으니 원종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 답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윤충은을 도로 가두었다. 장운익이 아뢰기를, “이 역적이 바로 죽는다면 정형(正刑)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흉모를 이미 모두 자복하였으니 물어볼 것이 없을 것 같다. 속히 처치하라.”하였다. 지의금부사 김응남이 아뢰기를,“옛글에 죄인을 사(社)에서 죽인다고 하였으니, 형을 집행하는 데 일정한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또 반드시 서쪽에서 하는 것은 숙살(肅殺)의 방위임을 취한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에는 그렇게 하지만사세에 따라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역적을 처 치하는데 어찌 모두 방위를 가릴 수 있겠는가? 적괴 송유진은 승복하는 공초를 받았으니 처참(處斬)하라.”하였다.
【초사(招辭)에, 국가가 위란한 때를 틈타 흉모를 품고 불궤(不軌)한 일을 도모하여 인신(印信)과 체문(帖文)을 만들어 인민(人民)들을 유인하고 군량과 무기를 탈취, 군사를 이끌고 반역(叛逆)하기 위해 여러 곳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경성을 범하려 모의하였다고 했다.】상이 이르기를, “사형을 집행한 뒤에는 의례 그 죄상(罪狀)을 써서 수급과 함께 거리에 매어다는 것이지만 지금은 중국인이 보고 있기 때문에 온편치 못하다. 상규(常規)를 어기더라도 그가 역적인 것만은 분명히 밝히라!”하니, 장운익이 아뢰기를,“패면(牌面)에 단지 모반 대역(謀叛大逆)이라는 글자만 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릇 역적을 토죄함에 있어서는 그가 살았건 죽었건 마땅히 전형(典刑)을 바루어야 한다. 오원종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미 역모에 참여하였으니, 전형을 바루어야 한다.”하니, 심희수가 아뢰기를, “제적(諸賊)들의 말이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아 죄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오원종이 마침 기운이 되살아났으니 초사를 받아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하였다.【초사에, 역적 송유진과 결당(結黨)하여 성명을 고치고 박정자니 오 참봉이니 하면서 흉모와 비계(秘計)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경성을 범하려 했다고 하였다.】상이 이르기를, “적도들이 이미 수백이나 모였었다고 하니 만일 발각되기 전에 바로 아산(牙山)의 관창(官倉)을공격하였다면 반드시 고을에서 방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적이 창고를 점거하고서 이밀(李密) 처럼 군대를 모았다면 굶주린 백성이 구름같이 모여 순식간에 대군(大軍)을 이루었을 것이고 군현(郡縣)도 바람에 쓸리듯 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제때에 체포한 것은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하였다.
김천수를 형신하여 다시 공초를 받았는데 초사(招辭)의 대개는, “송유진이 일찍이‘경상도 사람 여대로(呂大老)는글을 잘하면서도 못하는 것처럼 하고 술을 잘 마시면서도 못 마시는 것처럼 하고 병이 없으면서도 병이 있는 것처럼 하니, 필시 이상한 사람이다. 지금 섬에 있는데, 그 섬은 내포(內浦)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칙서는 오원종이 온 뒤에 진중(陣中)에 있었으니 이는 오원종이 가지고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원종이 매양 ‘공물(貢物)을 당초 견감시키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이미 견감하였다가 도로 받아들이니 백성을 속인 것이 너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더욱 많아졌다. 마땅히 홍근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上京)하여 성을 포위하고서 3일간 통곡한 다음, 인하여 동궁(東宮)을 세우면 백성들에게 유리할 것이다.’하였습니다.”하였다. 김천수를 3차 형문(刑問)하여 자복받은 다음 참형에 처하였다.【초사에, 역적 송유진과 동모하여 결당하고 총리(摠理)라 호칭하면서 경성을 범하려 했다고 하였다.】상이 이르기를, “여대로가 다시 적의 입에서 거론되었으니 마땅히 잡아와야 한다.”하니, 김응남(金應南)이 아뢰기를, “여대로의 사람됨을 신이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지례현(知禮縣)을 맡았을 적에 정사를 잘하였다고 들었고 가는 곳마다 국사를 위하여 마음을 다한다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금산(金山) 사람이니 김늑(金玏)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역적이 말한 여대로의 형모를 본다면 그 사람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송유진은 이산겸ㆍ노일개ㆍ여대로를 모두 괴수라고 하였는데 적괴가 어찌 3인이나 된단 말인가?”하니, 신점(申點)이 아뢰기를, “역적이 여대로와 혼인하려 했다고 하는데 송유진은 천족(賤族)이고 여대로는 사족(士族)에다 부잣집이니 반드시 서로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천수의 초사에 거론된 사람은 처음 공초에 나오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궁을 세워 대통을 잇게 한다면 백성에게 이로울 것이고시사(時事)가 절로 좋아질것이라는 이 한 조항은 어찌하여 누락시켰는가? 즉시 첨가하여 기록하라!”하니, 문사 낭청(問事郞廳) 최관(崔瓘)ㆍ신흠(申欽) 등이 부복(俯伏)하여 아뢰기를, “상세히 살피지 못하여 황공하옵니다.”하였다. 장운익이 문사 낭청을 추문하라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서서히 하라! 전 병판(兵判)은【이항복(李恒福).】지난 기축년에 문사 낭청으로 있을 때 필한(筆翰)이 물 흐르듯 하여 멈춘 적이 없었어도 빠뜨린 것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지체하고 또 이렇게 빠뜨린단 말인가?”하고 인하여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전 병판을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하였다. 상이 영상에게 이르기를, “역적 가운데 모의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잡아다 추문해야 할 것이나, 곡식 을 준 자들은 내가 죄명(罪名)을 깨끗이 씻어 주겠다.”하니, 장운익이 아뢰기를, “홍근 등을 당상(堂上)으로 승진시켜주면 반드시 의구심이 없어져서 사실대로 적괴를 말할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죄인에게 이미 전형(典刑)을 바루었으니 고변(告變)한 사람은 의당 당상으로 올려 주어야 한다.”하였다. 즉시 홍근 등을 불러 고변(告變)을 주창한 사람은 누구인가고 물으니 세 사람이 공을 다투었다. 장운익이 아뢰기를, “홍우(洪瑀)와 홍각(洪殼)이 주창하였으므로 내외가 서로 호응하여 체포한 것인 듯합니다.”하니, 상이 즉시 이비(吏批)와 병비(兵批)에게 명하여 탑전(榻前)에서 당상으로 올리게 하고 조사(朝謝)를 내어 홍우ㆍ홍각ㆍ홍난생에게 주도록 하비(下批)하였다. 장운익이 아뢰기를,
“죄인을 체포하여 전형(典刑)을 바루었으니 의당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고 팔도(八道)에 효유하여 의혹을 풀어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사(有司)가 있으니 해사(該司)에 말하여 조처하게 하라!”하였다. 유춘복(柳春福)을 형신하고 재차 추문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산겸과 노일개를 이 적(賊)이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니 추문하라!”하였다. 유춘복의 공초의 대개에 “군사를 일으켰다면 나는 돌격장(突擊將)이 되었을 것이고 또 변희(卞喜)ㆍ정천기(鄭天機)와 변희의 아우로 이름을 홍작(弘鵲)으로 고친 자도 돌격장이 되었을 것인데, 들어와 경성을 포위하고 동궁(東宮)을 세웠다면 좋게 되었을 것입니다. 노일개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산겸은 길삼봉(吉三峯)이라고도 일컫는데 이산겸과 이산해(李山海)는 섬에 있습니다.”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적은기진하여 죽게되었으므로정신이 황란(荒亂)하여 물을 수가 없다.”하고, 이어 초사를 받아 참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초사의 대개에 “역적 송유진과 결당하여 돌격장으로 호칭하고 반역을 모의하여 거사할 날짜를 약속하고 경성을 범하려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명하여 조원(趙瑗)을 잡아와 칙서가 오고간 사유를 추문하게 하였다. 조원이 공초하기를, “신의 몸에 중병(重病)이 있는데 오원종이 이 병에 침을 잘 놓는다고 하기 때문에 그에게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10월 이후 아산(牙山)에 가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함께 같은 마을에 거주하였습니다. 이달 초에 오원종이 와서 직산(稷山)에 도적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즉시 아산 현감 최유원(崔有源)에게 서간을 보내어 알렸습니다. 칙서(勅書)는 제 자식의 장인인 정흠(鄭欽)에게서 온 것인데오원종이 몰래 훔쳐간 것입니다.”하였다.상이 명하여, 최유원을 잡아와 서간을 통했던 일의 허실을 추문하게 하였다. 최유원이 아뢰기를,
“조원이 서간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하니, 즉시 최유원을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죄인들에게 범죄 사실을 남김없이 자백받아야 하는데, 사용하는 신장(訊杖)이 너무 크니 그 크기를 조금 줄이도록 하라!”하였다. 정인각(鄭麟覺)이 공초하기를, “본래 천안 사람인데, 금년 1월 3일 송유진이 15인을 데리고 오다가 전라(全羅)의 대로(大路)에서 나를 만나자 결박하여 앞서가라고 구박하므로 부득이 두려워서 따라갔습니다. 다음날 아산의 개현사로 들어가 하루를 묵고 미륵사로 내려갔더니, 홍우 등이 나를 부르기에 양전(良田)의 초막(草幕)으로 향하였는데 홍난생이 나를 잡아 직산에 가두었습니다. 유진 등이 한어(漢語)나 문자(文字)로 서로 은밀히 말했기 때문에 적중(賊中)에서 한 말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하고, 김언상(金彦祥)은 공초하기를, “본래 직산에 살던 몸으로 적에게 사로잡혔습니다. 12월 19일 밤 이웃 사람인 정세문(鄭世文)의 집에 어떤 양반(兩班)이 들어가 머물렀는데 행동거지가 황당하였습니다. 세문이 나에게 구원을 요청하므로 즉시 궁시(弓矢)를 가지고 갔더니, 20여 인이 나를 포위하고 결박하여 잡아다가 송유진에게 주었습니다. 유진이 나에게 의병(義兵)을 모집하라 하였는데, 이른바 양반은 바로 오원종이었습니다. 적장 송유진ㆍ홍근ㆍ홍우ㆍ홍난생 등은 가는 곳마다 같은 방에 들어가 은밀히 모의하였기 때문에 사정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밖에는 다시 들은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정인각과 김언상을 형신(刑訊)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으므로 도로 가두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 밖의 죄인들도 모두 형신해야 하겠는가? 이미 체포하였으니 죄주지 않을 수 없다고도 하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하니, 정곤수(鄭崐壽)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어찌 위협에 따른 자가 없겠습니까. 중한 자만 다스리고 그 나머지는 짐작하여 조처해야 합니다.”하였다.
2) 선조실록 199권, 선조 39년 5월 26일 계사 4번째 기사 / 훈련 도감 포수로서 궁가에 투탁한 명단
훈련 도감 포수(砲手) 등으로서 궁가에 투탁(投托)한 자는 다음과 같다.
“임해군(臨海君)의 집에는, 좌사 전초(左司前哨) 이다물손(李多勿孫), 전사 좌 초(前司左哨) 지천남(池千男) 등은 본가의 노자(奴子)라 일컫고, 우사 중초(右司中哨) 허환수(許還守)ㆍ윤인(尹認)ㆍ황업동(黃業同), 우사 좌초 고덕남(高德男), 우교사대(右敎師隊) 지응복(池應福) 등은 비부(婢夫)라 칭하였으며, 전사 좌초 이금동(李今同)ㆍ이성회(李成會)는 지금 북으로 갔으며, 여의건(呂義虔)과 좌교사대 박응복(朴應福) 등은 투탁(投托)하였습니다.이상 11명은 별로 도감의 일을 거역함이 없었습니다. 전사 전초 양화개(梁火介), 우사 전초 김수생(金獸生), 중사 후초 박경인(朴景仁), 좌사 중초 최허롱(崔許弄), 우사 좌초 박정남(朴正男), 좌사 전초 김충남(金忠男), 좌사 중초 주흥복(朱興福) 등은 투탁하였는데, 이상 7명은 거역하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원군(定遠君)의 집에는, 중군 군뢰자(中軍軍牢子) 주언상(朱彦祥), 전사 전초 최천손(崔千孫) 등 2명은 투입(投入)하였으나 초역(哨役)은 폐하지 않았습니다. 좌사 우초 배기수(裵麒守)ㆍ이인륜(李仁倫) 등은 무술년 3월에 전교로 인하여 성천(成川)에 배행(陪行)하였다가 그대로 투입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며, 좌사 우초 김경운(金景雲), 우사대(右師隊) 권응복(權應福), 좌사 중초 송문상(宋文祥), 우사 좌초 안무인(安戊寅) 등이 투탁하였는데, 이상 6명은 거역하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순화군(順和君)의 집에는, 좌교사대 김혜손(金惠孫), 좌사 전초 조천상(趙天祥) 등 2명은 투입하였는데 초역(哨役)은 폐하지 않았습니다. 후사 중초 홍유근(洪有謹)ㆍ유인남(柳仁男) 등은 투입하고 후사 우초 박대신(朴大信), 전사 전초 조대길(曺大吉)ㆍ 차업동(車業同) 등은갇혀 형(刑)을 받은 후 도망하였다고 하는데, 이상 5명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사 전초 이응남(李應男)은 전창위(全昌尉) 집에 투입되었는데 나타나지 않았고, 우사 좌초 함금(咸金)은 대군방(大君房)의 노자(奴子)로 공물(貢物)을 거두러갔다 하였는데, 을미년 이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도감의 초군(哨軍)은 바로 임금의 친병(親兵)인데, 왕자가 이에 감히 숨겨두고 종으로 삼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왕자의 죄이다. 그러나 도감에서 만약 그 가운데 더욱 심한 자를 적발하여 잡아다가 효시하였다면 군율이 엄숙해져 자연 두려워 복종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초부터 감히 묻지 못하다가 엄지(嚴旨)가 내린 뒤에도 손을 쓰지 못하고 끝내 좌시를 한탄하며 회계 하였으니, 어찌 도감에 죄가 없다고 하겠는가?
3) 선조실록 201권, 선조 39년 7월 3일 경오 2번째 기사 / 훈련 도감에서 궁가에 드나든 군인들의 처벌에 관해 아뢰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군인 가운데, 궁가(宮家)를 드나든 사람을 다방면으로 붙잡았으나 도망친 자가 매우 많습니다. 전날 계하한 단자 안에, 살수(殺手) 홍유한(洪有漢)의 작폐가 더욱 심하다 했기 때문에 1년간으로 충군(充軍)하기 위해 그대로 수감했는데, 그 동류들이 모두 체포되기를 기다려 일괄적으로 처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박경인(朴敬人)ㆍ김충남(金忠男)ㆍ유인남(柳仁男) 등 세 사람은 지은 죄가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으므로 앞편의 포수(砲手)가 들어갈 때에 벌로써 부방(赴防)케 하여 일시에 보내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