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70세가 넘고서도 정사(政事) 때문에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 중에서도 정일품관(正一品官)에게는 임금이 특별히 ‘궤장’을 하사(下賜)했는데, ‘궤’는 팔을 궤고 몸을 기대는 안석(案席: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이고 ‘장’은 지팡이를 말한다. 궤장을 하사할 때는 임금이 친히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를 ‘궤장연(几杖宴)’이라 했다. 그래서 ‘입기사(入耆社)’니 ‘사궤장(賜几杖)’이니, 하는 것을 큰 영예로 여겨졌으므로 족보에까지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대원군[大院君]과 부원군[府院君]
‘대원군’은 왕의 대를 이을 적자손(嫡子孫)이 없어 방계(傍系) 친족이 왕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을 때에그 왕의 친부(親父)에게 주는 군호(君號)이고 ‘부원군’은 왕의 장인 또는 일등공신에게 주던 군호로서 받은 사람의 관지명(貫地名)을 앞에 붙인다.
▣사패지[賜牌地]
고려‧이조 때에 국가에 공을 세운 왕족과 관리에게 주는 토지, 토지의 수조권(收租權)을 개인에게 이양한 것으로 일대한(一代限)과 3대 세습의 두 종류가 있다. 사패에 가전영세(可傳永世)의 명문이 있는 것은 3대 세습을 허락한 것이고 이러한 명문이 없으면 일대 한으로 국가가 환수키로 한 것이나 환수하지 않고 대대로 영세사유화(永世私有化)가 됐다. 선조 이후에는 사패기록만 주고 실제로 토지는 사급하지 않았다.
▣예장[禮葬]
정일품(正一品) 이상의 문무관(文武官) 및 공신(功臣)이 졸(卒)하면 국가에서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일종의 국장(國葬)이다. 이외의 예장 범위는 대체로 참판(參判)‧판서(判書)를 지낸 사람 또는 특지(特旨)가 있는 경우에 한하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일반인들의 경우 통상 3일장을 많이 치루며 화장률이 매우 높아진 실정이다. 매장(埋葬)을 고집하던 우리나라의 장례문화가 급속히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10월〈보건복지부〉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화장률이 74.0%로 20년 전인 지난 1994년(18.4%)보다 4배가량 늘어났다.
장례 10건 중 8건이 화장으로 2011년과 비교해도 2.9% 더 높아져 화장 문화가 완전히 뿌리내렸음을 드러냈다고 한다.
▣배향[配享]
공신‧명신 또는 학덕이 높은 학자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나 문묘(文廟), 서원(書院) 등에 향사(享祀)하는 일.
▣시호[諡號]
벼슬길에 있던 자가 죽은 후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종친(宗親)과 문‧무관으로서 정이품(正二品) 이상의 실직(實職)에 있던 자에게는 시호를 추증(追贈)한다.
그러나 친공신(親功臣)이면 비록 직품이 낮다고 하더라도 시호를 추증한 다. 대제학(大提學)의 벼슬은 정이품인데, 이에 준하여 종이품(從二 品)인 제학(提學)이라도 또한 시호를 추증한다.
덕행과 도학(道學)이 고명한 유현(儒賢)과 절의(節義)에 죽은 사람으로서 현저한 자는 비록 정이품이 아니더라도 특별히 시호를 내린다.
▣정려[旌閭]
특이한 행실에 대한 국가의 표창(表彰), 충신(忠臣)‧효자(孝子)‧열녀(烈女)들을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호패[號牌]
조선시대 때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던 패. 표면(表面)에 주소, 성명, 직업, 본관, 연령 등을 새기고 이면(裏面)에는 발행관청 명을 낙인(烙印)하였다. 신분에 따라 아패(牙牌), 각패(角牌), 황양목패(黃陽木牌), 소방목패(小方木牌), 대방목패(大方木牌)로 구분되었다.
▣추증[追贈]
추증이라 함은 본인이 죽은 뒤에 벼슬을 주는 제도로서 가문을 빛내게 하는 일종의 명예직인데, 추증의 기준을 보면 종친(宗親)과 문‧무관으로서 실직(實職) 이품(二品)인 자는 그 3대(代)를 추증한다.
그 부모는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증조부모는 각각 1품계씩 강등(降等)한다. 죽은 처(妻)는 그 남편의 벼슬에 준한다.
대군(大君)의 장인(丈人)은 정일품, 왕자인 군(君)의 장인은 종일품을 증직(贈職)하고 친공신이면 비록 벼슬의 직위가 낮아도 정삼품을 증직한다. 일등공신의 아버지는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을 추증하고 삼등공신의 아버지는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을 추증하여 모두 군(君)을 봉한다. 왕비의 죽은 아버지에게는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그 이상의 3대는 따로 정한 국구추은(國舅推恩)의 예에 의한다.
세자빈(世子嬪)의 죽은 아버지에게는 좌의정(左議政)을 추증하고 대군의 장인에게는 우의정(右議政)을 그리고 왕자의 장인에게는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한다.
▣묘역[墓域]
묘역은 계절(階節)과 배계절(拜階節)로 구분하며 일반적으로 계체석(階砌石: 장대석, 長臺石)을 설치한다.
봉분(封墳)의 앞이나 우측에 묘표(墓表‧墓碑‧碑石)를 세우고 혼유석(魂遊石)과 지실(誌室)을 마련한다. 그리고 앞에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 향안석, 香案石)을 놓고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을 세운다.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며 경기 지방의 조선시대 사대부 묘에는장명등(長明燈), 동자석(童子石), 문인석(文人石), 석수(石獸) 등을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분묘(墳墓)의 형태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고려 묘제에서 계승된 호석(護石):둘레석)을 두른 직사각형 무덤이 일부 사용되었다.
일반 서민들의 묘(墓)는 대개 젖가슴 모양[乳形]이나 움모양[突形]을 이루는데, 어느 경우나 정면에서 보면 반원형을 띄고 있다. 또 많은 경우 봉분과 사성을 연결하는 용미가 있는데, 이것은 지맥(地脈)이 무덤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다소 풍수적인]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성은 묘역 전체의 분위기를 아늑하게 함과 동시에 북쪽의 찬 기운을 가리고 좌‧우측을 북돋우는[주산(主山)과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의미]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는 무덤 뒤쪽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묘역 쪽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아 봉분의 침식을 방지하는 토목공학적인 효과가 주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거의 보이지 않다가 중기 이후부터 등장하였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사성을 하나만 두르거나 설치하지 않는 곳도 있다.(일부 지방에서는 새의 날개처럼 생겼다 하여 ‘활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묘기지권[墳墓基地權]
분묘기지권은 ①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얻어 분묘를 설치한 경우 ②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받지 않더라도 분묘를 설치하고 20년 동안 평온‧공연하게 점유함으로써 시효로 인하여 취득한 경우 ③ 자기 소유의 토지에 분묘를 설치한 자가 분묘에 관해서는 별도의 특약이 없이 토지만을 타인에게 처분한 경우 가운데 한 가지 요건만 갖추면 성립한다. 그 범위는 그 분묘의 기지뿐 아니라 분묘의 설치 목적인 분묘의 수호 및 제사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 분묘기지 주변의 공지(空地)를 포함한 지역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본다.
[대법원 판례 85다카 2496]
그 존속 기간은 민법의 지상권 규정을 따를 것이 아니라 당사자 사이에 약정이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그에 따른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에는 권리자가 분묘의 수호와 봉사를 계속하는 한 그 분묘가 존속하고 있는 동안은 분묘기지권이 존속한다고 해석한다.
[대법원 판례 81다 1220]
분묘기지권은 그 효력이 미치는 범위 내라고 할지라도 기존의 분묘외에 새로운 분묘를 신설할 권능(權能)은 포함되지 아니하는 것이므로 부부 일방이 먼저 사망하여 이미 그 분묘가 설치되고 그 분묘기지권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그 후에 사망한 다른 일방의 합장을 위하여 쌍분(雙墳) 형태의 분묘를 설치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