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들
시조(始祖) 휘(諱) 우(佑)는 고려 전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토적(討賊)에 공을 세워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올라 온양군(溫陽君 : 溫水君, 온수는 온양의 옛지명)에 봉(封)해졌고 2世 영헌(令獻)이 호부상서(戶部尙書), 3世 찬(贊)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4世 방필(邦韠)이 은자광록대부 문하평장사(銀紫光祿大夫門下平章事) 상국(上柱國)으로 거란병(契丹兵)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시조에 이어 온양군에 봉해졌으며, 5世 세훈(世勳)이 이부시랑(吏部侍郎)을, 6世 리휴(履休)가 공부상서(工部尙書)를, 7世 용(用)은 광정대부 문화평리 상호군(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판도판서(版圖判書) 보문관제학(寶文館提學)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으며, 온양군에 세 번째로 봉해졌다.
8世 인(仁)은 중랑장(中郎將)∙ 첨지정사(僉知政事)를, 9世 복태(福泰)가 도령중랑장(都領中郎將)∙호분위 대장군(虎賁衛大將軍)을, 10世 진(振)은 정순대부 방예빈시사(正順大夫邦禮賓侍事)∙추밀원지사(樞密院知事)를 지냈으며, 11世 양익(良益)이 봉익대부 판전객시사(奉翊大夫僉知政事)를, 12世 영비(英庇)는 가정대부 호조전서(嘉靖大夫戶曹典書), 강계진관방어유수(江界鎭管防禦留守)를 거쳐 진현전대제학(進賢殿大提學), 대광봉익대부 문하시중(大匡奉翊大夫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두문동 72학자사건 중 일원(杜門洞七十二學者事件中一員)이다.
13世 중조(中祖) 우(宇)는 무예(武藝)가 뛰어나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芳園)에게 잠저(潛邸) 때부터 총애를 받았으며 1400년(정종 2)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과 지중추(知中樞) 박포(朴苞)가 거병작난(擧兵作亂)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상당후(上黨候) 이저(李佇), 우정승(右政承) 하륜(河崙),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조영무(趙英茂), 좌군동지총체(左軍同知摠制) 신극례(辛克禮) 등과 함께 정안공(靖安公)을 도와 정성(精誠)을 바쳐 협찬(協贊)하고, 오래 조호(調護)를 부지런히 하여 익대좌명한 공으로 추충분익대좌명공신(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에 책록되었고, 희천군(熙川君)에 봉해졌으며,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훈련관 군자제주(資憲大夫兵曹判書兼訓鍊觀軍諮祭酒)에 이르셨다. 시호(諡號)는 양정(襄靖)이다. 고로 후대(後代)에 관향(貫鄕)을 온양에서 희천으로 개관(改貫)하였다.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유지(有智)는 습봉희천군(襲封熙川君) 가선대부 병조판참(嘉善大夫兵曹參判)을, 차남 유신(有信)이 운산군수(雲山郡守)를, 삼남 유석(有晳)은 가선대부 공조참판(嘉善大夫工曹參判)을 지냈다. 그리고 중조(中祖)의 3세손 인문(仁門)이 신창현감(新昌縣監), 4세손 총(聰)은 결성현감(結城縣監)을, 5세손 백순(伯醇)이 1528년(중종23)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대교(待敎), 함경평사(咸鏡評事), 예조좌랑(禮曹佐郎), 경상도사(慶尙都事), 호조(戶曹)∙공조정랑(工曹正郎),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 인삼진첨사(麟山鎭僉使),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내고, 통정대부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 예조참판겸홍문관제학동지(嘉善大夫禮曹參判兼弘文館提學同知), 경연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었다.
6세손 규(戣)는 1552년(명종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1년(명종16) 식년 강경(式年講經), 1564년(명종19)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평강현감(平康縣監),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성(司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간(司諫),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曺)· 형조(刑曹)· 공조(工曹)등 오조(五曹)의 낭관(郎官),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행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行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종부시(宗簿寺)∙ 예빈시(禮賓寺)∙ 사복시(司僕寺)∙ 군자감(軍資監)∙ 내섬시(內贍寺)의 정(正), 사유(師儒)를 지내고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兼春秋館編修官)에 이르렀고,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어 장단(長湍)과 연안부사(延安府使), 파주(坡州)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지냈으며,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 상서원(尙瑞院正),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증직되었다.
또한 극희(克熙)는 갑산부사(甲山府使)를, 7세손 준두(遵阧)가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준계(遵階)는 1583년(선조16) 별시 무과(別試武科: 虎榜)에 급제하여 내삼청(內三廳), 영암(靈巖)∙ 간성군수(杆城郡守), 밀양(密陽)∙ 대구(大邱)∙순천(順天)∙ 동래(東萊)∙ 철원(鐵原)∙ 온성(溫城)∙ 회령부사(會零府使), 경기수사(京畿水使), 충청(忠淸)∙ 황해병사(黃海兵使), 호서절도사(湖西節度使),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지내고 자헌대부 남도병마 절도사 겸 북청도호부사(資憲大夫南道兵馬節度使兼北靑都護府使)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공(戰功)과 성상(聖上)을 호위(扈衛)한 공으로 선무(宣武)와 위성원종공신(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밖에 8세손 엄(渰)이 기장현감(機張縣監)∙ 감찰(監察)을, 백균(百均)은 병조참의(兵曹參議), 낙(洛)이 회령부사(會寧府使)를, 형(浻)이 병조정랑, 신(新)이 담양부사(潭陽府使)를, 9세손 표(彪)가 강진현감(康津縣監), 성립(成立)이 밀양부사(密陽府使)를, 10세손 일(鎰)이 형조좌랑(刑曹佐郎), 희열(希說)은 파주현감(坡州縣監)을, 충남(忠男)이 부사과(副司果)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임란 때 성상을 호종(扈從)하여 항전활동을 보좌하고 적을 격퇴시킨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었고, 11세손 광진(光震)이 돈용교위(敦勇校尉), 13세손 양수(養秀)는 감찰, 16세손 진희(鎭熙) 선조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내어 가문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