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선조-Ⅳ
통훈대부 행 사헌부집의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집의공
通訓大夫 行 司憲府執義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 執義公
집의공(1530∼1580)께서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엄(景嚴) 호는 수촌(水村)이고, 휘(諱)는 규(戣)이시다.
1530년(중종 25, 庚寅) 중조 양정공 휘 우(宇)의 내손(來孫:6세손)으로 태어나셨으며 할아버지는 결성현감 휘 총(聰)이시고 아버지는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휘 백순(伯醇)이시며 어머니는 정부인 원주변씨(貞夫人原州邊氏)로 선전관(宣傳官) 몽정(夢程)의 따님이시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공은 어릴 적부터 문장을 깨우치고 책 읽기를 좋아 하셨다고 한다. 1548년(戊申年, 명종 3년)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상사(喪事)와 제례(祭禮)를 예경(禮經)에 따라 행하였으며 복제(服制)를 마치고 1552년(명종 7, 壬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시고 1561년(명종 16, 辛酉) 식년 강경(式年講經) 병과(丙科)로 급제하신 후 1562년(명종 17년, 壬戌)에 평강현감(平康縣監)에 초배(初拜)되셨다. 그후 1564년(명종 19, 甲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신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셨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셨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567년(명종 22, 丁卯) 11월에 병조정랑(兵曹正郎)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시다 1569년(선조 2, 己巳)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수찬(修撰)이 되셨다가 부교리(副校理), 행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行校理知製 敎兼經筵侍讀官)을 지내셨다.
또한 1573년(선조 6, 癸酉) 1월 신응시(辛應時)는 이조정랑(吏曹正郞)에 공은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이 되셨는데, 같은 해 7월 행 사헌부집의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行司憲府執義知 製敎春秋館編修官)에 오르셨다.
훗날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 都承兼經筵參贊官)ㆍ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ㆍ상서원정(尙瑞院正)ㆍ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증직(贈職)되셨다.
공은 장단(長湍)과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출보(出補)되셨다가 파주목사(坡州牧使)를 거쳐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옮기신 다음해인 1580년(선조 13, 庚辰) 향년 51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정배(正配)는 숙부인 소주 완산이씨(淑夫人昭 主完山<全州>李氏)로 중중(中宗)의 왕자 해안군(海安君) 이희(李㟓)의 따님이시다. 불행하게도 슬하에 자녀가 없어 종형(從兄:사촌형) 휘 전(戩)의 4남 중 막내아들인 휘 준두(遵阧, 초휘는 유녕)를 입적(入籍)시켜 후사(後嗣)를 삼았으며 뒤에 측실(側室)에서 1남 2녀를 두셨는데, 아들 휘 경용(慶龍)은 후손과 행적이 전해오지 않고 장녀는 종실의 덕창령(德昌令) 이여유(李餘幼), 차녀는 풍해수(豊海守) 이린(李麟)의 아내가 되셨다.
아버지 위주군(威州君) 휘 백순(伯醇)의 뒤를 이어 별시 문과에 급제하시어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정랑 등 낭관(郎官)이 되시기 다섯 차례였고, 종부시(宗簿寺), 예빈시(禮賓寺), 사복시(司僕寺), 군자감(軍資監), 내섬시(內贍寺)등의 정(正)이 되시기 역시 다섯 차례였으며 사유(師儒),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성(司成)이 되신 것도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또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弘文館) 등 삼사(三司)를 거치며 많은 치적(治積)을 남기셨으나 적자(嫡子) 없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시어 후대(後代)에 큰 벼슬이 끊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문(家門)에 큰 별이 졌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묘(墓)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송추 가마골 선영(先塋)의 경좌지원(庚坐之原)에 쌍분(雙墳)으로 모셨다. 그러나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배위(配位)의 묘표(墓表)가 전해오지 않는다.